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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행동연구소조회 수: 22007, 2014.12.15 02: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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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할 뻔했던 신기후체제 협상과 유엔기후변화협약이 구조됐다. 페루 리마에서 진행된 제2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각국은 14일 새벽 1시경(현지시간) 이른바 ‘기후행동을 위한 리마 요청(The Lima Call for Climate Action)’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이번 회의는 내년 말 파리에서 열릴 제21차 당사국총회를 앞두고 국제사회가 치르는 마지막 예비시험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공식 협상시한을 하루 넘긴 지난 토요일 저녁만 해도 “협상 타결은 물 건너갔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합의는 환영할만한 것이다.
한 편의 반전드라마, 파국은 피했다
외신을 보면 각국 대표단들도 이번 회의 결과에 대체로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과 이틀 전만해도 ‘기후변화협약 무용론’까지 거론하며 격렬하게 대립했던 선진국과 개도국들이 막판에 5페이지 분량의 합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전문가들은 일단 이번 당사국총회의 의장을 맡았던 마누엘 풀가르 비달 페루 환경부장관의 역할에 주목한다. 풀가르 비달 장관은 투명한 회의 운영으로 잡음의 소지를 미연에 차단했으며, 막판에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합의문 초안에 선진국과 개도국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담아내는 뚝심과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종합의문에 대해 “텍스트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모든 당사국들의 입장을 모두 담아냈다.”고 평가했다.
지난 11월 12일 미국과 중국이 기후변화 대응에 합의하면서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 시작된 이번 당사국총회가 좌초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기후변화의 책임과 부담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의 해묵은 갈등이 재연되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주축인 선진국과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베네수엘라,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포함된 ‘생각이 같은 개도국(like-minded developing countries)’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다음과 같은 쟁점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1. Post-2020 신기후체제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책임분담 방식
2. 선진국들이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재원 조성 로드맵의 구체화
3. 합의문에 ‘손실과 피해(loss and damage)’ 메커니즘 포함 여부
4. 각국이 제출하는 온실가스 감축 공약의 검토(review) 시기 및 절차각국이 이번 리마 합의에 큰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이유는 합의문에 위의 4가지 쟁점이 절충된 형태로 모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협상대표의 아이스크림에 담긴 의미
첫째, 신기후체제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책임분담 방식은 지난 20여년간 선진국과 개도국들이 가장 풀기 어려웠던 난제였다. 이번에도 인도와 중국 등 개도국들은 기후변화협약의 기본 정신인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과 각자의 책임(CBDR-RC)” 원칙의 적용을 주장하며 선진국들이 ‘역사적인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일부 개도국들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지금 1992년에 이루어진 선진국(부속서 I 국가)과 개도국(비부속서 국가)의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합의문은 개도국이 주장해왔던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과 각자의 책임(CBDR-RC)” 원칙을 재확인하되, “상이한 국가 조건의 관점에서”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미국 등 선진국의 입장에서 “상이한 국가 조건의 관점에서”라는 문구는 우리나라, 중국, 브라질, 멕시코 등의 달라진 배출량과 경제력 등을 향후 감축 분담 논의에 반영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선진국과 개도국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선진국으로서는 개도국 그룹에서 선발개도국들을 분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협상 타결 직후 토드 스턴(Todd Stern) 미국 기후변화협상단 대표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협상 결과에 만족감을 표시했다는 외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재정 지원’과 ‘손실과 피해’, 막차를 타다
둘째, 재원 공여 규모를 매년 확대해 2020년부터는 매년 1000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한 녹색기후기금(GCF) 조성 문제도 막판까지 이번 협상을 달궜던 뜨거운 쟁점이었다. 현재 약 102억 달러의 기금이 확보되었지만 이 기금의 제공 시기는 향후 4년에 걸쳐 있어 실제로는 매년 25억 달러 정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개도국들은 리마 합의문에 보다 구체적인 로드맵을 담지 못하면, 2020년부터 매년 1000억 달러를 조성한다는 선진국들의 약속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우려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자는 선진국들이었다. 합의문에는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들의 과감한 감축과 적응을 위해 증진된 재정 지원을 제공한다.”는 원론적인 내용만 담겼기 때문이다. 개도국 입장에서는 “모든 당사국에 적용되는 신기후체제 합의문은 무엇보다도 완화, 적응, 재정, 기술개발 및 이전, 역량강화, 행동 및 지원의 투명성을 균형감 있는 방식으로 다룬다”는 문구를 지렛대로 내년 협상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셋째, 지난주 토요일까지만 해도 협상문 초안에서 제외되어 군소도서국가들의 격렬한 비난과 항의를 불렀던 ‘손실과 피해’ 메커니즘은 최종 합의문에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포함됐다. ‘손실과 피해’ 메커니즘이 새로운 재정지원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이번 리마 협상의 최대 승자는 군소도서국가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이번 합의문에 언급된 내용이 1년전 바르샤바에서 합의한 ‘손실과 피해에 관한 바르샤바 국제 메커니즘(Warsaw international mechanism for loss and damage)’의 수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손실과 피해’ 메커니즘의 불씨를 살려 내년 파리 합의문에 구체화된 형태로 담으려는 개도국들의 노력은 내년에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shall’과 ‘may’의 차이?
넷째, 각국이 제출하는 온실가스 감축 공약의 검토 문제는 선진국들이 이번 리마 협상에서 반드시 얻어내려 했던 내용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중국이 자국의 감축계획에 대해 외부에서 검토하는 것은 ‘주권에 대한 모욕‘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 이번 합의문에 따르면, Post-2020 감축목표 등 각국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기여(INDC, 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가 형평성 및 2℃ 상승 억제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것인지 다른 당사국이 검토할 수 있는 유엔 차원의 공식적인 절차는 사라진 상태다.
하지만 비록 구속성이 강한 ’shall’이라는 표현이 ‘may’라는 표현으로 약화되었다 해도 모든 국가들이 자국이 제시하는 INDC의 명확성(clarity), 투명성(transparency), 이해성(understanding)을 확보하기 위해 기준연도, 적용 시기, 방법론 등 구체화된 내용을 제공한다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선진국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합의문은 유엔기후변화협약사무국이 웹사이트를 구축해 각국이 제시한 INDC를 공개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2015년 11월 1일까지 각국의 INDC를 종합해 그 영향을 분석한 종합보고서(synthesis report)를 발간하도록 명시했다. 최소한의 공개 절차에 불과하지만 INDC를 제출하는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체면을 생각해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하지만 공식적인 검토 절차가 배제된 상태에서 각국이 제시하는 감축목표가 형평성 및 2℃ 상승 억제라는 목표에 부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으로서는 신기후체제에 대한 합의가 내년 말 파리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각국의 감축목표에 대한 검토와 조정은 2016년 또는 그 이후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커졌다.
기후변화협상 타결의 승자는 우리 모두
이번 회의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나라에 가해질 감축 압력과 재정 지원 요구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1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윤성규 환경부장관과의 면담에서 온실가스 감축계획 등 INDC 방안을 내년 3월까지 제출해달라고 주문한 것이 좋은 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도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가 경제적 능력에 걸맞은 행동을 취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더구나 이번 리마 합의를 통해 개발도상국 지위에 안주해왔던 우리나라의 태도는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리마 회의 결과는 국제사회가 ‘파리로 가는 길’, 다시 말해서 선진국과 개도국이 모두 참여하는 신기후체제로 가는 길목에서 느리게나마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리마 기후변화협상 타결의 승자는 특정 국가가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우리 모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부담스러운 결정은 모두 미루어졌기 때문에 내년 최종 협상에 이르기까지는 가시밭길이 이어질 것이다.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이기주의의 덫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후변화라는 인류 공동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경제 수준, 역사적 책임, 사회적 조건에 걸맞은 책임과 역할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기후변화행동연구소 안병옥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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