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론] ‘느린 총알’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조회 수: 4648, 2011.05.25 1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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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로 불릿(slow bullet)’ 게임이 시작됐다. ‘느린 총알’을 뜻하는 슬로 불릿은 천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고엽제와 그 피해자를 가리키는 미국식 표현이다. 이 게임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순한 사실 확인에만도 넘어야 할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다.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배상과 원상회복까지는 규칙 자체가 너무 불공정하게 짜여 있다.



    고엽제 불법매몰 규명 ‘산넘어 산’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미군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에 많은 양의 드럼통과 화학물질을 묻은 적이 있다는 사실 정도다. 그제 주한미군이 밝힌 미 육군 공병단 보고서에는 헬기장 주변에 살충제, 제초제, 솔벤트 용액 등 맹독성 화학물질이 담긴 많은 양의 드럼통을 묻었다고 기록돼 있다. 매몰 시점도 1978년으로 동일하고 매몰 장소도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전역한 미군 병사들의 ‘고엽제 대량 매몰’ 주장은 사실로 판명된 셈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주한미군이 공병단 보고서를 인용해 매몰한 지 1년여가 지난 후 40t에서 60t가량의 드럼통과 흙을 퍼내 부대 밖으로 반출했다고 밝힌 사실이다. 미군은 이들 물질이 어느 지역으로 옮겨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며, “2004년에 매몰지역 13곳에서 토양시료를 채취해 검사한 결과 12개 시료에서는 다이옥신이 나오지 않았고 시료 1개에서만 미량의 화학물질 흔적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범죄 사실은 인정하지만 증거물은 사라져 확인할 길이 없고 피해도 경미하지 않으냐는 뜻으로 해석된다.

    미군이 묻은 고엽제 드럼통이 기지 내에 남아 있느냐의 문제는 진실규명의 첫 단추이자 핵심에 속한다. 고엽제가 매몰된 지점과 영외 반출 여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민관합동조사단이 벌이고 있는 기지 주변 환경영향조사의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시료 채취지점 선정부터 어렵고 조사결과가 나와도 그것이 지닌 정확한 의미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군이 묻은 고엽제의 행방이 묘연하다면 향후 피해 규모와 책임범위를 가늠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주한미군 측이 밝힌 대로 고엽제 오염토양의 반출이 실제 일어났는지 조사하는 일이다. 독성물질이 기지 바깥으로 나갔다면 이동경로, 종착지, 최종 처리방식까지 확인돼야 한다. 이런 일들은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다. 미군당국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78년부터 80년까지 ‘캠프 캐럴’의 자재 및 폐기물 반출입 기록 등을 공개하는 것이다. 공개에 부담이 있을 수도 있지만 뭔가 숨기려는 것으로 비쳐져 미군의 해명 전체가 의심받는 것보다는 낫다. 물론 기록에만 의존해서는 실체 파악이 불가능할 수 있다. 따라서 매몰 장소로 지목되고 있는 헬기장 주변을 파내 확인하는 것이 사건 실체에 빨리 도달하는 방법이다. 지난 21일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은 필요하다면 양국 부처 관계자들이 참관한 가운데 발굴을 진행할 수 있다고 밝힌 터다.


    조사 걸림돌 ‘SOFA’ 개정해야

    이처럼 기초적인 사실 확인이 끝나더라도 헤쳐 나가야 할 일은 쌓여 있다. 칠곡 미군기지 인근 마을에서는 암이 잇따라 발생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부천 미군기지에도 화학물질을 대량 매몰했다는 퇴역 주한미군의 증언이 나온 상태다. 기지 인근 주민들에 대한 건강역학조사는 물론 다른 미군기지에서는 고엽제 불법매몰이 없었는지 조사돼야 한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 조항 개정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고엽제 대량 불법매몰과 같은 심각한 사태가 발생해도 기지에 접근하지도 조사할 수도 없는 현실을 방치한다면, 그건 주권국가임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반도 곳곳에 ‘느린 총알’을 쏜 미군이 책임은커녕 총알조차 회수하려 하지 않을 때, 건강한 한·미관계 형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11.05.25, 경향신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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