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육두구의 저주와 땅의 노래: 『육두구의 저주』를 읽고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조회 수: 276, 2024.06.12 16:29:33
  • 육두구의 저주 - 예스24

     

    그레타 툰베리가 엮은 『기후 책』에서 ‘인식격차’라는 제목이 붙은 아미타브 고시의 글(『기후 책』, pp. 399~403)을 읽었다. 고시가 기후 관련 도서에서 많이 인용되는 저자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쓴 책을 검색했고, 최근에 나온 『육두구의 저주』에 호기심이 끌려 읽게 되었다. 아미타브 고시는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에서 성장했고 영어로 『유리 궁전』 등의 소설과 지구 위기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파헤친 『대혼란의 시대』를 써서 세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다. 

     

    꽤 두꺼운 『육두구의 저주』를 읽고 나서 든 첫인상은 그야말로 ‘거대한 퍼즐 맞추기구나’ 라는 것이었다. 수천 조각, 수만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 맞추기. 아미타브 고시가 이 책을 시작하기 위해 처음으로 집어든 조각은 ‘떨어지는 램프’이고, 두 번째 조각은 육두구 열매다. 고시는 이 작은 조각들에서 출발해서 수천 가지 조각을 찾아내 신중하게 맞춤한 자리를 정해 정교한 조각 맞추기를 해나간다. 여러 대륙과 바다, 섬을 거치며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수백 년을 거슬러 올랐다 다시 돌아오고 미래까지 뻗어나가며, 엄청난 그림을 맞춰낸다. 이 책의 부제는 지구위기와 서구제국주의이지만, 이 단어들만으로는 고시가 완성한 그림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없고, 고시의 깊이 있는 통찰력을 아우를 수 없다. 

     

    이야기는 1621년 어느 날, 반다 제도(Banda Islands)의 어느 섬에서 램프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육두구 나무의 본산지인 반다 제도 사람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함대 소속 군인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죽거나 도망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인도양 남쪽의 활화산 구눙아피와 그 환경이 섬사람들에게 준 선물 육두구 열매가 저주의 열매로 둔갑하게 된 것. 이 비극을 이끈 동인은 무엇일까? 흔히 생각하듯, 이 특이한 향신료에 대한 유럽인들 탐욕 때문일까? 대충 이런 이야기로 전개되는 게 아닐까 하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저자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수천 가지 조각을 모아가며 폭력을 동반한 제국주의가 지구 위기를 낳았음을 예리한 추적을 이어가며 치열하게 파헤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군대를 시켜 마을을 불사르고 섬사람들의 배를 빼앗거나 파괴했고 결국 반다 제도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군대의 무기에 살해된 경우도 많았지만, 군대의 폭력을 피해 산중으로 들어갔다가 굶주림과 질병, 저체온 때문에, 또는 집단 자살을 결행하여 목숨을 잃었다. 고시는 이 만행이 섬 주민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저질러진 제노사이드였으며, 집과 농지, 선박 등 삶의 물리적 기반을 깡그리 파괴하는 전략을 통해 자행되었음을 강조한다. ‘반다 주민의 말살은 인간에 대한 표적 사례뿐 아니라 이들의 생활 방식을 지탱해 준 비인간 관계망 전체를 파괴함으로써 자행되었다(『육두구의 저주』, pp. 61-62)’.

     

    이 책을 읽으며 눈길이 끌렸던 단어가 ‘테라포밍’(terraforming)이다. 흔히 공상과학소설에서 낯선 행성의 환경을 정복하여 인간의 용도에 맞도록 개조하는 것을 테라포밍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실에서도 일부 억만장자들이 지구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화성 이주를 준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테라포밍은 다른 행성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가상의 사건이 아니라, 이곳 지구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전개되어 온 일이다. 자신이 사는 땅과는 다른 땅을, 자신이 속한 종과는 다른 생물종을, 자신이 속한 집단과는 다른 인간을 자신이 부리기 편한 용도로 개조하는 일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며 지구 곳곳에서 벌어져왔다. 

     

     그러나 유럽인에 의한 북·남미 식민지화 과정, 즉 테라포밍은 그 이전과는 비할 데 없이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기후변화와 자연의 반격, 종간 불평등 등의 심각한 위기가 빚어지고 있다. 유럽인은 불과 몇백 년 만에 지구 지표면의 25% 이상을 급격하게 바꿔놓았고 그에 따라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지구 생태계가 변화의 몸살을 겪었다. 그들은 정착형 식민지로 삼으려는 지역에서 숲, 강, 식물, 동물 등 생태계에 변화의 씨앗을 뿌렸고, 그 지역의 토착민은 변화한 생태계, 천연두, 콜레라 등의 병원균 등 비인간 존재들이 관여하는 끝없는 전쟁 상태에 시달린 끝에 죽거나 달아나거나 정착민에게 예속되었다. 저자는 이런 식민화가 총과 무기를 통해서만 진행되는 게 아니라 대규모의 생물학적 생태 파괴를 포함한 생물 정치적 전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다수의 사례를 들며 강조한다. 

     

    이와 연관하여 이 책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조각이 바로 ‘자연에 대해 침묵시키기’다. 저자는 인류 대다수에 대한 유럽 식민지 지배자의 침묵시키기가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침묵시키기와 결국 분리될 수 없는 과정임을 꿰뚫어본다. 식민화는 인간뿐 아니라, 이 모든 비인간 존재를 하잘것없는 존재, 인간의 손길로 개선해야 하는 존재로 취급하며 그들을 정복하고 그들을 침묵시켰다는 것이다. 

     

    이제는 태곳적 자연 생태계를 품고 있던 곳에서조차 자연 자원이 자생적으로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약탈적으로 채취되고 숲과 산이 헐려 거주지와 농지가 되고 인간의 효율을 위해 강과 바다가 메워진다. 이런 행위의 근간에는 숲과 강, 동물, 식물 등의 비인간 존재는 이성도 감정도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전 지구적 테라포밍 과정에서 유럽인은 자신이 지구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가진 종이라는 믿음을 더욱 굳혀갔고, 식민화의 대상인 토착민을 열등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치부하며 이들이 수세 대에 걸쳐 이어왔던 생태계와 긴밀히 소통하는 생활 방식을 말살하고, 그들의 전통을 쓸모없는 쓰레기로 취급했다. 

     

    저자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고 묻는다. 그는 인류의 상당 부분이 동물, 나무, 화산, 육두구를 비롯한 온갖 존재가 행위 주체성, 의사소통 능력, 그리고 의미를 창출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여겼다는 점을 짚으며, 자연의 여러 실체와 이른바 ‘자원’이 기본적으로 비활성이고 아무런 자체적인 행위 주체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서구인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을 읽은 뒤에 나는 『육두구의 저주』 120쪽에서 고시가 소개한 소설 『솔라리스』를 읽었다. 폴란드의 공상과학 소설가 스타니슬파프 렘이 1961년에 펴낸 이 소설은 그야말로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충격을 준다. 이 소설은 인간을 제외한 존재는 모두 비활성이라고 보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그린다. 미지의 행성 솔라리스를 탐사하기 위해 우주 정거장에 와 있는 연구원들이 솔라리스에서 얼핏 지구의 바다처럼 보이는, 그러나 지구의 바다와는 전혀 다른 존재를 만나며 내면의 충격과 갈등을 겪는다. 바다는 끊임없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면서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물체를 빚어내고, 순식간에 만들어진 그 형성체들은 다시 어느 순간 가뭇없이 사라진다. 심지어 바다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며 행성 방문자들의 정신을 해부하여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관념들을 끄집어내 형상화하는 능력까지 있다(이 경이로운 바다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의 압권이니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직접 읽었으면 좋겠다). 

     

    인간은 우주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과학 기술을 나날이 키워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과학 기술만으로 우주적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대단한 과학 기술을 가지고도 지구라는 존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지구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귀에 들리지 않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정당하고 무시당하고, 존중되지 않은 채 말살당하는 존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거라는 생각, 인간 외의 존재 앞에서는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는 우리의 오만을 버리지 않으면 미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소설을 읽은 뒤 한동안 머리가 묵직했다. 

     

    고시가 꺼내 든 ‘비인간 존재의 행위 주체성’이라는 퍼즐 조각은 『기후 책』에 글을 쓴 또 다른 작가 로빈 월 키머러의 생각과도 연결되어 있다. 키머러는 『기후 책』에서 세상은 모든 생명체가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두에게 그 영향이 미치는 상호 연결의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그는 세상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세상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안에 든 것을 한 숟가락씩 나눠 먹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본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세상을 단순히 자원 창고로 보는 사고방식과 인간 중심주의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미 있는 기후 행동을 하려면 많은 것을 바꾸어야 한다. 세금 구조, 법률, 정책, 산업, 의사결정 구조, 기술, 윤리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우리가 갚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기후 책』, 키머러, p. 530).

     

    『육두구의 저주』에는 열대우림 식물을 탐사하러 간 식물학자에게서 식물에 대해 잘 안다고 칭찬을 받은 토착민 가이드가 즉석에서 대꾸한 말이 키머러의 인용을 통해 소개되어 있다. “맞아요. 그런데 모든 잡목의 이름은 배웠지만, 노래는 아직 배우지 못했어요”(『육두구의 저주』, p. 139).

     

    번역본 부제는 지구 위기와 서구제국주의라고 되어 있지만, 『육두구의 저주』 원서에는 ‘위기에 처한 행성을 위한 우화 Parables for a Planet in Crisis ’라는 부제가 있다.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책이 서구제국주의 비판서일 것으로 생각했다. 저자는 훌륭한 필력으로 떨어지는 램프에서 시작해서 서구제국주의 비판을 넘어서서 비인간 존재, 즉 자연의 행위 주체성과 숨은 힘을 이야기한다. 아미타브 고시의 거대한 퍼즐, 『육두구의 저주』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거의 평생을 땅의 노래를 듣지 못하고 살아와서인지, 나는 비인간 존재의 행위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럴 법하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가슴 울리는 공감으로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퍼즐 조각, 지구 위기를 초래한 것이 서구 제국주의가 장려하고 키워온 인간의 오만함이라는 점만큼은 깊게 새길 수 있었다. 

     

    아미타브 고시가, 로빈 월 키머러가, 그리고 그레타 툰베리가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지구와 관계를 맺고 있고, 지구는 꾸준히 변화하며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땅의 지배자라는 오만 위에 도사리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겸손히 가슴을 열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 땅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야 할 때다. 폭염, 가뭄, 홍수 등 땅의 경고에 두려워 떨지만 말고, 땅의 벗이 되어 땅의 노래를 듣고 부르는 법을 배워야만 진정으로 의미 있는 기후행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제 ‘땅의 노래’라는 퍼즐 조각에 맞는 다른 조각들도 찾아보려고 한다.

     

    참고문헌

    그레타 툰베리 엮음, 『기후 책』, 김영사, 2023.

    스타니스와프 렘, 『솔라리스』, 민음사, 2022. 

    아미타브 고시, 『육두구의 저주』, 에코리브르, 2022.

     

    이순희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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