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위기 시대,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교회의 역할과 전망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조회 수: 799, 2024.08.22 16: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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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의 의뢰에 따라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의 김신영, 이인미, 유미호가 함께 쓴 논문 ‘기후위기 시대,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과 저력과 전망 연구’의 일부분이다. 지면 관계상 서론의 연구 목적과 의의 부분과 2장의 해외 교회 이야기, 그리고 4장의 ‘기후위기시대를 향한 ’ 소금’으로서의 기독교적 가치‘로서의 ’평화, 정의, 희망, 사랑, 함께삶(공존), 창조‘에 관한 부분을 생략하였다(원문 문의: ecochris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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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환경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

     

    생태환경 문제에 대하여 한국의 신학자들과 여러 교회가 우리 사회를 향하여 한목소리로 신학적·신앙적 관심을 일관성 있게 표현하기 시작한 기점을 특정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히 전개되던 1970년대를 지나며 1980년대에 이르러 치명적 환경오염 문제가 곳곳에서 불거질 무렵, 또 전 세계적 충격을 유발했던 원자력(핵)발전소 사고들(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이 발발했을 때쯤, 몇몇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서 생태환경에 대해 크고 작은 관심이 싹튼 현상이 관찰된다. 그런데 그 관심의 세기와 크기는 교단마다, 교회마다, 신학교마다, 혹은 기독교인 개인마다 짐짓 별도로 진행되는 양상이었기에 일관된 역사적 집합적 흐름 같은 것이 포착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신학적 관심 및 교회적 관심의 분위기가 한국교회 내에 전무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이전체 한국교회를 온전히 단합된 힘으로 ‘대표’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970년대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태환경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을 신학적 관심과 교회적 관심으로 분류하여 살펴본 후 교회의 실천적 방안을 찾아보기로 한다.

     

    3.1.1 신학적 관심

     

    생태환경 문제를 교회의 책임에 잇대어 탐구하는 신학적 논의는 서구사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흔히 린 화이트(Lynn White)의 1967년 논문“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기원)”을 그 효시로 본다. 이 논문에서 저자 화이트는 “비록 사람의 몸이 진흙으로 만들어졌지만, 사람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창조신앙을 예시하면서, 수 세기 동안 간직해온 서구사회의 기독교를 “세상에서 더 없이 가장 인간중심적인 종교(anthropocentric religion)”라고 비판했다.[1] 이 논문에 대한 당대 신학자들의 첫 반응은 비우호적이었다.[2] 논문의 내용 못지않게 논문의 저자가 역사학자라는 점도 신학자들 사이에 비우호적 반응이 번지는 데에 일조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결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화이트의 주제의식에 동의하는 신학자들이 점차 증가했다. 아울러 인류의 생태적 위기에 기독교가 비중 있게 기여했음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면 향후 생태위기의 타개 또한 기독교가 그 원인제공을 전격 중단함으로써 가능하리라는 긍정적 아이디어도 파생되었다. 

     

    한국의 경우, 연세대 서남동 교수가 1970년대 초에 ‘생태학&신학’을 주제로 하는 논문을 두 편 연달아 발표하면서 아직은 국내에 낯설었던 생태신학의 서막을 열었다. 서남동은 1970년에 “생태학적 신학서설”을, 1972년에 “생태학적 윤리를 지향하여”를 각각 펴냈다. 그는 “생태학적 신학서설”에서 1세기의 인물 사도 바울과 20세기의 인물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를 나란히 예시하면서 기술문명이 생태학적 위기를 모면하려면 급진적 자기변혁이 필요하다고 썼다.[3] 두 번째 논문 “생태학적 윤리를 지향하여”에서는 앞서 1967년에 나왔던 화이트의 논문을 요약·소개하는 한편 기독교인들의 윤리가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인류로서의 종의식(Species Consciousness)” 즉 생태학적 윤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하지만 그 이후 거의 이십여 년간 생태신학 논의를 집중적으로 전개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전 세계적으로 생태신학 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활발해지면서 우리나라 안에서도 생태신학 논의가 부쩍 늘어나게 되었다. 그때 당시 전 세계 생태신학계의 모습은, 한 연구자가“생태신학의 춘추천국”이라고 불렀을 정도인데,[5]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자평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당시 논의된 생태신학 담론을 그저 분류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은 작업에 속한다. 주로 국외 신학자들을 ‘범재신론, 탈범재신론, 신중심적·청지기적 유형’으로 나누는 이도 있고,[6] 국내 신학자들을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보수적, 자유주의적, 중도적’을 적용하여 단순하게 구분한 이도 있다.[7] 모든 생태신학이 결국은 기독교의 창조론에 연결되었다고 파악하는 입장이 있지만,[8] 생태신학 자체를 거부하는 극도로 인간중심적 신학에서부터 혼합종교적·유사종교적 신학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나누어 무려 열두 가지 분류표를 제시한 이도 있다.[9] 어떻든, 1990년대부터는 해외에서 생산된 다양한 생태신학 담론이 국내에 열정적으로 수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1990년대 말에 이르면 이정배를 시작으로 생태학적 신학과 전통 동양사상(예를 들면, 유교사상)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논의들이 나타나면서 향후 ‘종교 간 대화’라는 분류를 파생하기도 했다.[10]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생태신학 논의들 가운데 ‘생명신학(Theology of Life or Reformed Life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생명신학은 생명의 본질을 천착하며 성찰하는 신학적 연구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생태신학과 많은 접점을 내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의 도래로 인해 기후변화가 내포하는 과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문제의식이 다양해지면서 그에 대한 접근법도 복잡해짐에 따라 생명신학과 생태신학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점차 증가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독특한 생태학적 관점을 시험적으로 구현한 신학논문도 있는데, 한국에서 ‘동물신학’이 가능한지에 관하여 탐색하는 연구논문이 그것이다.[11]

     

    3.1.2 교회적 관심

     

    한국교회의 생태환경 관련 문제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전 세계 기독교 교회의 전반적 흐름과 꼭 일치되어 흘러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예 분리되어 흘러온 것도 또한 아니다. 일정 정도 발맞추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전 세계 기독교 교회들의 교회적 관심을 간략히 개괄하고자 한다. 전 세계 기독교 교회들은 1910년 애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주제: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에서 기술과 환경의 관계를 숙고한 바 있다.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영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걸친 “전인적 삶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선교의 목표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예비적 실현”으로 정립하는 지점에 이르렀다.[12]

     

    흔히 사람들은 사회참여, 다시 말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는 전통적 복음주의 교회들이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별로 열정도 없었다고 지레짐작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물론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R. W. Stott)의 신중한 관찰에 따르면, 복음주의 교회들은 오래도록, 특히 냉전시대에 대체로 사회참여보다는 복음전도에 더욱 더 집중해 온 인상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게 단선적으로 평가할 일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974년 로잔대회 때 “총체적 선교(integral mission)” 개념을 공유하면서 복음주의 교회들은 환경문제를 포함한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에 공감하였으며, 이 문제들에 대하여 교회들이 신앙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다시 말해 사회참여의 의의와 방안을 탐색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복음주의 교회들은 1999년 <미가 네트워크(Micah Network)>을 결성했으며, 2009년에는<미가 네트워크> 회의의 주제를 “창조세계 청지기 선언과 기후변화(Declaration on Creation Stewardship and Climate)”로 설정하였다.[13] 다만 같은 시기, 위와 같은 국제적 큰 흐름에 관하여 국내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로 호응하고 동참했는지는, 기록이 충분치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 

     

    한편 교회일치운동 및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조직NCCK)>에 동참하는 에큐메니컬 교회들은 1975년에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서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교회와 신학의 핵심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1982년에는 국내에 기독교기관이자 비정부기구(NGO) 시민단체로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활동을 개시했는데, 이 기관은 <기독교환경운동연대(기환연)>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계속 활동 중이다. 생태적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에큐메니컬 측 교회들은 캐나다 밴쿠버 제6차 총회(1983년)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다시금 표명하였고, 1990년 대한민국 서울대회에서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JPIC)”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성찰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이 무렵 국내 여러 교단에서는 자율적으로 다양하게 환경운동을 전개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환경통신강좌’를 진행한 교단도 있었고, ‘생명길좁은문운동’을 전개한 교단도 있었다.[14] 비단 교단 조직뿐 아니라 개별 교회 단위에서도 환경 관련 부서가 설치된 곳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런데 에큐메니컬 교회들, 교단들의 생태환경에 관한 관심 및 운동은 민중신학, 민중교회, 그리고 민주화(민중)운동의 하나로 이해되고 실천되는 경향이 그때까지는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15]

     

    1990년대 말에 이르자, 사회적·정치적 이슈에서의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국내 교회들의 환경운동이 이전보다 확실히 활발해진다. 물론 환경운동이 국내의 교단과 교회들을 아우르는 조직력과 연속성을 발휘한 경우가 여전히 드물긴 하나,[16] 환경위원회(혹은 녹색위원회)가 설치된 교단과 교회들이 점차 증가하면서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환경운동’의 가능성 또한 점차 강화되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그러던 중, 2007년 12월 7일 서해안 태안반도 앞바다에 대규모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했다. 허베이스피릿(Hebei Spirit) 호, 삼성중공업, 그리고 현대오일뱅크의 판단오류가 중첩되면서 대형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고의 여파로 태안반도 앞바다 생태계는 즉각 오염됐고, 2008년 1월 태안반도 주민이 분신자살하는 참사마저 뒤따랐다. 이 사고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자마자 국내의 많은 교회가 처음엔 자율적으로 기름제거 자원봉사활동을 결정하고 발빠르게 사고현장을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교회가 신속하게 조직적으로 자원봉사를 전개했다. 개별 교회들은 자체 연락망을 통해 신속하게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였고, 그들을 사고 장소로 빠르게 수송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안 살리기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이 출범해, 자원봉사자 인력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분배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거의 전담하였다. 개별 교회 차원에서 위로금을 모아 태안 지역 주민들에게 전달하거나 자가용을 타고 가족 단위로 태안반도에 도착하는 기독교인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여러 구호물자와 남녀노소 기독교인 자원봉사대원들이 효율적으로 연합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조정자 역할을 해낸 것이 <한교봉>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전까지 생태환경에 그다지 큰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았던 복음주의 교회들이 앞장서서 태안반도 생태환경 복원을 위한 자원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사실도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17] 태안반도 곳곳에서 “힘내세요, 한국교회가 함께합니다”라는 현수막 아래 서로 다른 교회들이 말 그대로 한 몸처럼 활동하였기에, 그간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로 양분되었던 한국의 교회들이 생태환경 문제에 있어서는 조직적으로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현상은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바버라 해상원유 유출사고를 계기로 생태환경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과 의식이 눈에 띄게 치솟았을 뿐 아니라, 그 시민들이 힘을 합쳐 마침내 ‘지구의 날’ 제정을 끌어냈던 일에 비견할 만하다. 

     

    2011년 3월에는 또다시 커다란 환경오염 사고가 터졌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원전 사고 7등급(최악)의 대형 사고였다. 사고 직후 한국 교회들은 <일본재해공동대책협의회>와 <한국교회희망봉사단>을 빠르게 조직하여 일본 돕기에 나섰으며, 이 기관들은 이후 1년 남짓 꾸준히 활동을 지속했다.[18] 그 이후로도 선교사 개인 자격으로 또 개별 교회 단위로 일본 돕기를 계속한 이들도 제법 많았다. 이 사고를 계기로 기독교인 개인들 사이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파생할 수 있는 치명적 환경훼손 및 생명위협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핵없는세상을위한한국그리스도인연대> 모임이 생성되기도 했다. 

     

    또, 대중적으로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명 ‘녹색선교’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날아오는 황사로 인한 대기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몽골 등 사막 지역에 나무를 심는 봉사활동을 수년 동안 꾸준히 해온 기독교인들도 있다.[19] 몽골 지역 나무 심기 활동은 교회조직(예: <몽골복음주의협의회>)뿐 아니라 사업조직과도 활발히 연합하면서 이른바 “통전적 선교”의 본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20]

     

    그러면, 바야흐로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절실히 급진적으로 상승하여 가는 이즈음, 한국 교회들은 어떠한 정도로 생태환경과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으며 또 표현하고 있을까? 우선 검단참좋은교회, 공덕교회, 다리놓는교회, 봉원교회, 서울제일교회 등의 교회들이 플라스틱 포장용기 없이 내용물만 판매하는 ‘제로웨이스트샵’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교회들의 제로웨이스트샵 사례가 전국적으로 번져 더 많은 교회가 제로웨이스트샵을 운영하게 된다면 거대한 친환경적 소비자운동의 물결을 이룩해갈 수 있으리라 예견된다. 또, 최근 1~2년 사이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이 주관하는 ‘탄소중립 기후교회’ 워크숍을 통해 이 어두운 기후위기시대 ‘빛과 소금’으로 존재해야 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되새기며 지역사회 내에서 실천 및 연대 활동을 강구하는 교회들이 증가하고 있음 또한 눈여겨 볼 만한 주요한 흐름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다. 

     

    또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KEF, 한복협)>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2014년 5월 ‘월례조찬기도회 및 주제발표회’를 통해 “가정, 사회, 자연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성찰하는 가운데 자연을 인간의 파트너로 간주하는 신앙적 관심을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교계 안팎의 이목을 끌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은 2011년부터 전개해온 ‘자발적불편운동’의 내용에 2021년부터 기후위기 주제를 확충하여 기후위기 환경운동의 태세를 정비해 활동 중이고, <한국성시화환경운동본부>는 출범 이후 13년이 넘도록 “맑은 환경과 함께 더 행복한 세상”을 목표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 연구소(하만아세)>와<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등은 교회와 기독교인 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환경교육과 생태교육을 온 힘 다해 전개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후위기라는 생태환경 문제 대응 활동에 관한 한 교단과 지역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교회들의 거국적 연합활동을 기대해볼 만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녹색교회를 선언할 뿐 아니라 지구온도 상승1.5도로 묶어두는 실천방안으로 탄소금식을 선택하는 교회들이 늘어났다.[21] 2021년 3월에는 60여 개 교회와 기독교단체 및 80명 기독교인이 참여하는 <기후위기기독교비상행동>이 활동을 개시했고,[22] 2022년 2월에는 평신도 중심 활동조직으로서 <기후위기기독인연대>가 새롭게 출범했으며,[23] 2022년 6월 제6차 생명신학포럼에서는 한국교회의 이름으로 ‘탄소중립 기후교회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작금의 기후위기 비상사태는 한국교회 전반을 향하여 공통된 책임의식을 촉구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생명을 위협하며 조여드는 ‘불의한 기후변화’ 현상에 대항하여, 생명을 살리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독교적·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한국교회 내부에 형성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3.1.3 한계 및 의의

     

    19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기독교의 신학적 관심 및 교회적 관심에는 어떠한 한계가 있었을까? 먼저 신학적 관심의 한계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신학 논의의 면에서 생태신학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오늘날에도 전개되고 있음에도, 그것이 실제로 개별 교회 단위에서 인지되거나 적용되는 사례가 상당히 드물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만 활발한 신학논의는 교회 대중과 유리될 경우, 그 의미와 의의가 줄어들기 쉽다. 둘째는 해외의 생태신학 담론을 거의 그대로 가져오는 사례가 있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기후변화와 탄소중립은 전 지구적으로 보편적인 문제이긴 하나, 그 문제를 우리의 특수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답을 파헤치는 독자적, 주체적, 자율적 학문활동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확인되었던 환경문제에 대한 교회적 관심이 보인 한계를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교계 인사들이 인식하는바, 한국 교회들이 수십 년간 양분되어 있었다는 문제가 교회적 관심이 어느 정도 분산되는 양상을 낳게 된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WCC>에 대한 생각과 입장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채 수십 년간 교회들이 진영화되어 존재함으로써, 상대 진영 교회들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아왔던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데다 <WCC>의 한국조직인<NCCK>를 중심으로 모이는 에큐메니컬 교회들은 환경훼손 및 공해문제를 연구할 때, 또 반전반핵을 주장할 때 당시의 정부와 날을 세우며 반대를 외치는 쪽에 주로 서 있었다. 물론 그러한 저항적 자세가 때로 의미 있기도 했으나, 소위 ‘운동권’이라는 인상을 풍겨, 복음주의 교회들의 호응을 순순히 얻지 못하는 결과를 파생하기도 했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볼 때 20세기 초반 독일 나치당이 정책적,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전체주의적 녹색운동을 제외하고,[24] 여러 나라에서 발생한 녹색운동(환경운동)은 물론 대체로 ‘반정부’ 운동의 색채를 지녔다. 경제성장을 위해 개발과 발전을 추구하는 정부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반정부적 입장, 저항적 자세를 자연스럽게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더는 그러한 저항적 자세만으로는 전 지구적으로 도래한 기후위기를 타개해나갈 수 없다. 저항적 자세 못지않게 협력적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바야흐로 환경운동은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태양광전지판을 설치할 때 지자체의 혜택 조항을 살펴보는 것이 요긴하며, 쓰레기 매립장이나 재활용 쓰레기 문제도 지자체의 장단기 정책 및 추진계획을 알고 있는 편이 유익하다. 교회와 기독교기관들도 이러한 추세에서 예외일 수 없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마을)를 중심으로 연대하고 협력할 방안을 모색하여야 하는 것이다. 각 나라의 행정부에 설치된 환경부서를 통해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정책을 함께 고민해야 함은 물론이고, 기후변화를 위해 전 지구적으로 협력하여 단합된 행동을 실시함으로써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는 환경운동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위기 가득한 ‘기후응급’시대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역설했던바, 기후위기 환경운동은 반정부운동 차원에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25] 심지어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오늘날 환경보호론자들이 흔히 이윤추구밖에는 모른다고 생각하는 대기업들과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여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26]

     

    끝으로 한국기독교의 그간 생태환경에 대한 신학적 관심 및 교회적 관심이 아예 황무지 상태가 아니었다는 교회사적 의의를 유의미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교회마다 관심의 주안점과 집중력이 달랐다는 사실을 명확히 분별함과 동시에, 오히려 그렇게 서로 자유롭게 다른 방향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충분히 감사하며(appreciate), 축하하는(celebrate)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 에큐메니컬 교회들은 기독시민의 활동 차원에서 환경운동에 동참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복음주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선교 차원에서 환경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일 우리의 교회들이 서로 다르지 않고 획일적으로 똑같았다면 뜻밖에 병목현상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고, 너도나도 뛰어들어 불필요한 경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갖추고 있는 서로 다른 특징을 바라보면서 감사와 축하를 건네면서 향후 서로 다른 특징껏 환경운동을 ‘분담’한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협력 활동이 될 것이다. 동일한 행동을 일률로 실천해야만 협력하는 게 아님을 알 때, 그리고 진영논리를 앞세웠던 과거에서 우리가 배울 때, 우리는 미래를 더욱 건강하게 협력적으로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듯, 서로 다른 개인이 모이면 각자의 생각과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교회, 서로 다른 교단이 모이면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이 나타날 수밖에 없으니, 사소한 차이와 그에 따른 갈등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더구나 하나의 사안에서 목표가 상이하다면 상이한 목표를 서로 근접하게 조절하는 활동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하기에 협력의 활동이 나오기까지 시일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기후위기 타개를 위한 탄소중립’이라는 최종목표는 교회마다 달리 목표를 세울 수가 없는, 거의 절대적 주제다. 세상 모든 교회들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하나의 목표를 공유할 수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공동목표이자 최종목표를 함께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들은 유의미한 공동행동을 함께 시작할 수 있다. 이는 매우 희망적 표징(sign)이다.

     

    3.2 교회와 탄소중립, 그 필요성과 당위성

    3.2.1 필요성

     

    기후위기의 현실화로 인해 사회 전 분야가 기후변화의 영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각국 정부는 탄소세 도입과 탄소배출 감축목표에 대한 중장기적인 계획을 마련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종교계에도 영향을 주어 기후위기 대응과 적응에 더욱 관심을 두게 했다. 정부에서도 특정 부처가 기후나 환경문제를 담당하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부처가 기후위기를 점차 주요문제로 다루게 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기후위기 문제가 점차 중요하게 인식되어가고 있다.

     

    환경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은 교회의 신학적 노선에 따라 참여 양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기존의 환경운동 영역에서 다루던 문제의식을 넘어 이제는 우리 사회 전체와 전 지구 그리고 나아가 미래 세대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교회가 기후위기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 중이다. 

     

    기후변화가 대기 중 탄소농도의 증가로 인해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제 온 국민이 다 알 만큼 일반적인 지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탄소를 누가, 얼마나, 왜, 어떻게 배출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높은 수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후변화와 관련된 정책이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에 대한 관심도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있다. 교회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후변화에 대한 내용이 방송과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고 녹색교회, 생태목회 등과 같은 새로운 목회형태가 주목을 받으면서 환경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늘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기초로 하여 신앙적 실천의 저변을 확대하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교계와 교회 지도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 다양한 문제들에 분산되어 기후위기에 뜻을 모으기 어려웠고 기후변화는 여전히 환경운동의 한 갈래 정도로 여겨지며 외면받아 왔기 때문이다. 한편, 교회가 기후변화에 다소 무관심할 때 기후변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과 움직임은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며 사회적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이전에 기후변화가 대기중 탄소농도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극한기후현상 증가 등 자연재해와 연관되어 언급되어 왔다면 이제는 기후위기, 기후파국, 기후종말 등의 언어로 표현되면서 기후변화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많은 교회가 기후위기 문제에 관심을 두고 교회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기후위기의 현실을 고려할 때 더욱 구체적이고 계획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NCCK>는 ‘생명과 더불어 녹색희망으로―한국교회 2050탄소중립을 위한 생태교회 매뉴얼(2022)’을 발간하였다. 이 자료집은 예배, 교육, 선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정보와 실천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지역 교회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이후의 실천 계획을 수립할 동기를 부여한다.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사회가 지금까지 고수해 온 방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교회의 생태적 전환도 특정 매뉴얼이 제시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생태적 전환이 필요한 것은 공감하지만 대중들이 원하는 방식과 변화의 속도는 각자 다르다. 그리고 기후위기와 생태적 전환에는 수많은 이해당사자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교회가 전기를 절약하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핵발전에 대한 반대입장을 가지고 의견을 표명하는 데에는 의견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현실들은 개별 교회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교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이며, 이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전략이다. 구체적인 전략이 없이 캠페인처럼 진행되는 행동들은 지속성이 약할 뿐 아니라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 교회의 기후위기 대응도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전략 없이 진행된다면 교회 내부의 행사 정도에 머물 뿐 실질적으로 사회와 생태계에 미치는 효과와 기여는 미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논문의 주요 목적은 교회가 기후위기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행위에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기후위기에 왜 관심을 두고 이를 막기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단계에 있다면 이미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 정도가 매우 낮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논문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신앙적 결단과 기독교적 가치관의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러한 논의는 수십 년 전부터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3.2.2 당위성 혹은 전략

     

    이제는 구체적 전략을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교회가 왜 기후위기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언제부터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부족할 때 교회가 이런 논의를 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정부가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226개 기초지방자치단체가 ‘기후위기 비상선언’을 선포하고, 전국 80개 지자체가 ‘탄소중립 지방정부 실천연대’를 발족하는 등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부 및 시민사회와 함께 실질적으로 연대하며 더 나은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교회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교회는 새로운 사회적, 정책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정부 및 지자체, 그리고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실제적인 탄소감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의 유미호 센터장은 탄소중립을 생각하는 교회라면 이를 확인하는 데서 나아가, 그에 걸맞은 일을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며, 교회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순서를 따라가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27]

     

    첫째, 자신이 다니는 교회 내 위치나 모임 인원에 상관없이 우선 ‘탄소제로 녹색교회’를 결심하고 선언하는 것이다.[28] 탄소제로 녹색교회는 멀리 있지 않으며,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선정되는 것도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는 교인들이 늘어가면,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창조의 빛을 드러내는 녹색교회로 세워져 나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교회는 잠재적 녹색교회이며, 이를 드러내게 돕는 것이 자기선언이다. 누구든 모임을 만들고, 비전에 동의하는 이들을 모아 ‘탄소제로 녹색교회’ 선언을 하면 된다는 얘기다. 교회와 사회의 핵심 리더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폭넓은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한 과제인데, 창조세계의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계속 소통한다면 그들 역시 기꺼이 함께 걸을 것이다.

     

    둘째 단계는, 교회의 탄소배출량을 산출하고 그 출처를 분석하는 일이다. 전기와 가스 등 건물 에너지, 교통, 물, 음식, 종이 사용량 및 쓰레기 배출량에 대해 단순히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구체적 감축목표를 설정하고 이행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지금의 기후위기에 대한 자기 책임을 확인하게 해주며, 지금껏 지구에 부담을 준 생활방식에 대한 회개와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게 돕는다. 스스로 탄소배출량을 측정하는 저울 위에 올라선다는 것은, 교회가 줄일 수 있는 배출량이 어느 정도이고, 그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얼마이며,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의미 있은 성과를 위해 자원과 노력을 어디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지, 목표에 이르는 진행과정을 측정할 척도는 무엇이고 순조로운 진행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지 등을 살펴 목표지점까지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단계는, 탄소배출을 줄이거나 멈추기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모니터링 작업은 필수다. 그래야 추후 거둔 성과를 평가하고 아쉬운 점을 되짚어 전 과정을 더 나은 실천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전 교회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실천에 따른 효과를 공유해 참여를 독려하고 지속적 실천을 이끌 수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소외되었거나 힘겨워하는 이는 없는지 살피고 배려해야 한다.

     

    위의 세 가지 단계는 교회가 현실적이면서도 교회의 형편과 지역에 맞는 전략을 세울 수 있는 큰 그림을 제공한다. 먼저 탄소제로 녹색교회를 선언하고 인원수와 관계없이 이 일에 동참할 사람들을 모으는 일은 앞에서 언급한 해외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PCUSA>는 최소 2명이라도 교회 안에 환경팀을 구성하는 것을 제안한다. 다음의 두 단계는 전략의 구체화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안인 탄소배출량 산출과 모니터링에 대해 언급한다. 교회가 창조신앙이나 녹색신앙, 생태영성 같은 신앙적 언어와 함께 과학적으로 측정된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한다면 교회의 크고 작은 실천들이 지역사회와 지구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향후 전략수립의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3.3 탄소중립을 위한 교회의 실천방안

     

    탄소중립(net zero)은 탄소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류사회의 절박·긴박한 요구를 집약한 말이다. 탄소중립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적 용어가 아니며, 물론 선교적 용어도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제 탄소중립이라는 개념을 침착하게 납득하여야 하며, 탄소중립의 뜻을 적절하게 이해하여야 하며, 나아가 탄소중립 활동을 과감하게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가 탄소중립을 납득하고 이해하며 실천해야 하는 이유를 요약적으로 언급하자면 두 가지를 말해볼 수 있겠다. 첫째, 교회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완전히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복음을 전파(선교)하는 기능을 감당하고자 결단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가 맡은 ‘빛과 소금’이라는 역할도 사회를 떠나서는 현실적·실질적 의미가 없다. 둘째, 탄소배출의 주범은 혹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공동체 또한, 이 세상의 대지를 사용하고, 이 세계의 대기를 사용하며, 이 세계의 자연환경 범위 안에 모임장소를 설치해두고 운영하는 하나의 실물 조직체(organizational structure)로서 탄소를 배출해 온 데에 대하여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교회가 사용하는 모임장소(교회 건물)는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 각 나라들의 땅 위에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가 탄소배출에 책임을 지고 탄소중립에 나서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교회가 탄소중립이라는 과제에서 열외자나 방관자가 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에 불과하다. 이 장에서는 탄소중립을 위한 교회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여덟 가지를 제안할 것이다. 

     

    3.3.1 에너지 생산 및 소비

     

    탄소중립의 핵심은 에너지 생산 및 소비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에너지 생산은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크게 의존한다(2017년 전체 전력 발전량 중 석탄발전에 의한 발전량은 43.1%, 원자력에 의한 발전량은 26.8%로서 두 발전원에서 공급하는 전력량이 전체의 70%에 이른다). 특히 화석연료는 많은 탄소배출을 야기하기 때문에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공급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점차 늘려가야 한다.[29]

     

    우리 정부도 탄소중립의 우선적 과제를 에너지 전환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에너지와 관련하여 어떠한 실천을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교회의 활동은 주로 절전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예를 들면, 사용하지 않는 전자제품의 플러그를 분리하고 멀티탭을 사용하는 등 대기전력을 최소화하는 것과 사용하지 않는 전등을 소등하고 에너지의 날 행사에 동참하는 수준이었다. 

     

    빛은 하나님이 주신 최초의 에너지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빛을 만드신다. 창조 이야기 가운데 빛의 역할이 구체적으로는 기술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적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빛부터 만드신 것은 에너지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롭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명은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대기와 해류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고에너지 소비시대에 인류는 더 다양한 에너지원을 이용한다. 이 가운데 석유, 가스, 원자력을 제외한 태양광, 태양열, 풍력, 바이오 에너지 등의 신재생에너지는 태양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처음 주신 에너지원인 태양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 지구뿐 아니라 미래 세대들에게도 가장 경제적 부담과 위험을 덜 전가하게 된다. 원자력으로 생산하는 에너지는 지금 당장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에너지원처럼 보이지만 에너지 생산 전후과정에서 광범위한 환경파괴가 일어나며 ‘사용후핵폐기물’로 인한 위험성 및 관리비용 등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사용후핵폐기물’에 포함된 여러 방사성 물질들 가운데 잘 알려진 우라늄(U)-233과 플루토늄(Pu)-239는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핵연료로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핵분열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공 핵종들인데, 이 물질들은 살아있는 생물에게 노출될 경우 매우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만드신 빛의 근원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는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와 환경을 제공하지만, 인간이 만든 에너지는 방사선을 많이 방출하는 핵물질이나 탄소를 과도하게 배출하게 함으로써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주체로 도약할 때 탄소중립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에너지 생산과 소비는 구조는 불평등을 내포한다. 에너지 생산은 주로 지방에서 하는 한편 소비는 대도시와 수도권에서 이루어진다. 에너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기 위해 대규모 발전단지와 송전시설들이 필요한데 이 시설들은 주로 지방에 세워지고 이는 에너지로 인한 부정의를 야기한다. 

     

    에너지 프로슈머로서의 교회. 최근 마을 중심의 에너지 생산협동조합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시민들이 에너지의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이를 에너지 프로슈머(producer + consumer)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정보통신기술과 4차산업 기술을 통한 스마트그리드의 확산으로 점차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에너지 절약을 넘어 프로슈머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에너지 사용량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통해 불필요한 전력사용을 줄이고 냉난방시스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단열을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과 교회의 건물구조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컨설팅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30]

     

    마을의 에너지 전환을 이끄는 교회. 교회가 마을을 대상으로 에너지 프로슈머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도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인다. 마을에 빈터나 이용할 수 있는 옥상이 있다면 토지소유주나 건물주와 협의하여 소규모(10kW 이상)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하고 이를 연결하여 전력거래소와 연결할 수도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의 참여뿐 아니라 제도 및 기술적 지원이 있어야 활성화될 수 있다. 현재 정부와 지자체는 탄소중립을 위한 제도적 개선과 정보통신기술의 적용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발 빠른 움직임은 교회가 지역사회의 탄소중립에 크게 기여하도록 해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장통합 경기노회는 탄소중립 2050 실천을 위해 한국에너지공단 경기지역본부 및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과 함께 2022년 4월 26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탄소중립 2050’ 달성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였다. 이번 협약으로 3개 기관은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홍보 및 교육, ▲생활 속 온실가스 감축활동 전개 및 실천유도, ▲친환경자동차 보급 등 수송부문 온실가스 감축, ▲ 신·재생에너지 보급 등 건물부문 온실가스 감축 등에 적극적으로 협력, 경기도 내 교회들과 상호협력함으로 창조질서의 회복을 이루어가기로 하였다.[31]

     

    에너지 생산이이야말로 최고의 에너지 절약방법이다. 교회가 단독적으로 에너지 사용량을 점검하고 탄소배출량을 계산해서 절약운동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교회가 위치한 지역의 에너지 전환을 이끄는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게 될 때, 교회는 기후위기 시대의 방주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3.3.2 교통(수송)

     

    국내에서 소비되는 석유 가운데 약 1/3에 해당하는 32%가 현재 수송부문에 사용되고 있다.[32] 그리고 국내에 사용되는 운송수단은 대부분 석유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들은 온실가스(총배출량의 17%) 외에도 대기오염 물질을 발생시킨다. 이에 정부는 청정에너지로 생산한 전기와 수소를 이용해 수송부문의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비롯하여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차량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고 주차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등 차 없는 도시 만들기 운동을 통해 시민들이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수단이나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제도와 도로시스템을 정비하고 있다. 

     

    교회 역시 대중교통의 이용을 장려하고 차 없는 주일을 지키면서 교회차량을 온실가스 저배출 자동차로 전환한다면 교통부문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감소시킬 것이다. 캐나다의 녹색교회 네트워크(Green Church Network)[33]는 교통수단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주일 걷기(Sunday Walk)’ 운동을 제안한다. 이들은 교회가 자전거를 거치할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교회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문화를 만들기를 제안한다. 또한 주일 카풀제도를 통해서 가까운 곳에 사는 교인들이 함께 차를 타고 예배에 올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위한 카풀(Carpooling for Christ)’을 제안한다. 또한 정기적으로 차 없는 주일을 실시하고 주차장 사용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타인과의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차량공유는 앞으로 점점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자전거도로의 안전성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자전거 이용률도 의미 있게 증가할 것이다. 더불어 폭염/혹한 일수와 극한기후현상의 증가는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차량의 이용을 더욱 선호하게 만든다. 또한 화석에너지와 핵에너지에 의존하는 현재 상황에서 전기자동차의 증가는 탄소배출을 감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에너지 전환과 교통수단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3.3.3 먹거리

     

    먹거리에 대한 신앙적 접근을 해야 한다.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교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는 먹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창조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GMO, 유기농, 동물복지, 농촌살리기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먹거리를 다룬다. 그렇다면 교회는 탄소중립 차원에서 먹거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먹거리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뿐 아니라 먹거리가 생산되고 유통되어 우리 식탁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음식물 찌꺼기의 처리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기후변화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먹거리는 육류와 유제품이다. 특히 육류와 유제품의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가축들을 사육하기 위해 많은 자원이 투입된다. 많은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사료를 생산해야 하는데 이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은 대규모로 가축을 키우고 육류를 생산하기 위해 팜유, 대두, 옥수수 등의 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공장식 축산업은 공장식 농업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먹거리를 이야기할 때 공장식 농축산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공장식 농축산에 사용되는 토지는 지구 전체 면적의 26%를 차지하는데, 약 8억 2천만의 인구가 기아로 인해 고통받음을 고려해볼 때 이는 인간 사회의 매우 불합리한 현실을 보여준다. 또한 축산업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9%를 차지하며, 그 가운데 절반은 메탄이 차지한다. 또한 많은 숲과 초원, 습지 등이 사료를 생산하기 위한 토지로 사용되면서 생물다양성 감소 및 탄소흡수원의 상실이라는 생태적 파괴를 야기한다.[34] 또한 가축사료용 작물재배에 사용되는 살충제는 미국에서만 연간 11.7t이 넘으며 이는 동식물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고,[35]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 등 화학물질의 순환으로 인한 위험성을 증가시킨다. 한 마디로 육식섭취의 증가는 탄소흡수원을 파괴하고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하는 동시에 탄소와 메탄 등 온실가스의 배출을 증가시킴으로써 기후위기의 주범이 된다.

     

    교회가 생명밥상운동을 이끌어야 한다. 이전에도 생명밥상에 대한 교회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한국교회가 생명밥상운동과 먹거리 문제에 신앙적인 관심을 본격적으로 두기 시작한 것은 2002년경부터이다. 예를 들어 새문안교회 여전도회는 생명밥상운동을 전개하며 다음과 같은 수칙을 세우고 실천하였다. ▲단순·소박하고 불편한 조리를 즐긴다 ▲가공식품을 줄이고 제철음식을 먹는다 ▲육식보다 채소를 즐긴다 ▲일회용품을 줄인다 ▲빈 그릇 운동에 동참한다 ▲유기농 쌀로 밥 짓기 ▲미생물 EM(Effective Microorganism) 배양액을 발효해 식기세척기 세제로 사용하기. 이러한 운동들은 주로 교회의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여성교육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쌍샘자연교회(백영기 목사)는 성도들과 생명밥상 빈 그릇 운동을 실천하고, 주말농장을 운영하며 직접 유기농으로 채소를 재배한다. 또한 생활협동조합 ‘로컬푸드착한살림’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먹거리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며 생명에 대한 신앙적 이해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구제역, 조류독감 등으로 인해 많은 가축이 살처분되고 공장식 축산업 시스템에 의해 가축들의 생명이 경시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도시텃밭 활용하기 다음으로 교회가 실천해 볼 수 있는 것으로 도시텃밭이 있다. 교회가 인근지역에 토지를 마련하여 주말농장을 시도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접근가능성, 지속성, 교인들의 참여, 이동시 탄소배출 등을 고려할 때 교회 옥상이나 주변 공터, 상자를 이용한 텃밭 등을 상황에 맞게 시작할 수 있다. 또한 교회가 도시농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교육함으로써 교인들이 개인 주택의 옥상이나 베란다 혹은 일터에서도 도시텃밭을 일구어볼 수 있다. 도시농업을 통해 사람들은 직접 먹거리를 생산할 뿐 아니라 생태적 감수성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농사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해준다. 순복음명륜교회(최성구 목사)는 옥상을 텃밭정원으로 만들어 탄소중립 정책에 동참하고 있다. 이 교회는 옥상텃밭을 통해 교회는 지역사회와 소통하는데 부산 동래구청이 비용의 80%를 지원하고 교회는 20%만 부담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옥상텃밭에 사용되는 에너지는 태양광으로 생산하고 물의 불필요한 낭비를 막기 위한 화분과 물주기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3.3.4 쓰레기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포괄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환경부의 「전국 폐기물 발생 및 처리현황」을 살펴보면 1995년 이후 한국의 1인당 생활폐기물 발생량은 연평균 350-440kg 사이에서 증감을 반복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폐기물 종류별 일평균 발생량을 살펴보면 2020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은 하루 평균 534,055톤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236,183톤(44.2%)을 건설폐기물이 차지하며, 그 뒤를 이어 사업장 배출시설계 폐기물이220,951톤(41.3%)를 차지한다. 그리고 가정에서 배출되는 생활폐기물은 61,597톤으로 전체 폐기물 중 11.5%를 차지한다. 이는 가정에서 쓰레기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예견되는 쓰레기 대란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생활계뿐 아니라 건축폐기물과 사업장에서 배출되는 폐기물 발생을 줄이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탄소중립과 교회의 역할을 고려할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쓰레기 줄이기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교회를 중심으로 가장 활성화된 사례는 제로웨이스트샵이다. 제로웨이스트운동은 포장용기로 사용되는 플라스틱의 소비를 줄여 배출되는 쓰레기의 양을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검단좋은교회(유승범 목사)는 교회의 일부 공간을 활용하여 ‘자연공간 숨’을 만들어 제로웨이스트샵과 리필스테이션을 운영하고 이뿐 아니라 자원순환코너를 만들어 주민들이 PET 병뚜껑, 아이스팩, 우유팩, 에어캡, 폐건전지 등을 가져오면 이를 주민센터나 우체국에 제공하여 재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다양한 매뉴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제로웨이스트샵이나 리필스테이션은 교회가 별도의 공간과 인력을 배치해야 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실천하기 여의치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국내외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주로 교회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의 양을 모니터링하고 쓰레기 발생량을 줄이기 위한 자체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런 경우, ‘쓰레기제로 교회를 위한 도전과제 20가지’ 같은 매뉴얼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1) 쓰레기제로팀을 구성한다. 혼자 하면 힘들 뿐 아니라 지속가능하지 않다. 쓰레기의 상당량이 음식물 폐기물이니 교회 주방을 맡은 이들이 참여하거나 모임을 주도하면 좋다.

    2) 선언! 교회 내 환경을 맡은 부서와 함께 쓰레기제로 캠페인을 알린다.

    3) 교회 내 쓰레기 분리배출 가이드를 점검하고 전체 교우들에게 알린다.

    4) 휴지통을 감시한다. 매주 무엇이 버려지는지, 무엇을 재활용할 수 있는지, 무엇이 퇴비화될 수 있는지, 재사용할 수 있는 일회용품이 있는지 묻는다.

    5) 재활용을 시작하고 재활용 대상을 줄이는 방법을 궁리한다.

    6) 퇴비화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이용한다. 퇴비화는 최소 2분의 1에서 3분의 1가량의 쓰레기를 줄일 것이다. 

    7) 씻을 곳이 있다면 (없다면 마련해서라도) 일회용 컵(커피 컵) 및 접시를 대체한다. 정 어렵다면 썩는 물건으로 교체한다.

    8) 일회용 봉지에 든 설탕과 크리머 사용을 삼간다.

    9) 플라스틱 대신 다회용 숟가락과 티스푼을 사용한다.

    10) 플라스틱 물병을 강력하게 억제하고, 재사용할 수 있는 컵 또는 재활용 컵을 사용한다.

    11) (교회학교) 간식은 개별 팩에 든 주스보다 재사용 또는 재활용되는 대형 용기에 든 것으로 한다. 

    12) 교회학교 용품 구입 시 재사용할 수 있는 건지, 무엇이 기증되는지 살피고, 새로 살 때는 마커보다는 색연필, 썩는 재료로 된 물품을 사용한다. 파이프 클리너 사용을 고려한다. 

    13) 부엌에서 종이수건을 없애고 천을 사용한다.

    14) 욕실에 있는 종이수건은 퇴비화한다.

    15) 지역 교회 혹은 교인들이 종이 소식지(고지서)를 선택하지 않게 한다.

    16) 예배 때마다 종이인쇄를 하지 말고, 기도자료나 성경을 직접 사용한다.

    17) 일회용 플라스틱 대신 재사용할 수 있는 다회용 컵을 사용한다.

    18) 교회 공간을 사용하는 그룹이 ‘제로웨이스트 교회’에 대해 알게 한다.

    19) 음식을 보관할 때는 비닐봉투가 아닌 재사용이 가능한 용기를 사용한다.

    20) 이 일을 위해 인내심을 갖고 자주 기도한다. 마음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는 것은 시간과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재활용보다 새활용이 중요하다.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서는 분리배출이나 재활용보다는 재사용이 더 효과적이다. 재활용으로 분리배출된 폐기물들은 원래의 용도 그대로 재활용되지 않는다. 우리가 분리배출하는 재활용 폐기물들은 대부분 원래의 성질보다 낮은 품질의 원료가 되어 재활용되기 때문에 다운사이클링(Downcycling)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새활용은 폐기물을 새롭게 디자인하여 예술적, 환경적 가치가 높은 물건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새활용을 업사이클링(Upcycling) 혹은 창의적 재사용(Creative Reuse)라고도 부른다. 재활용과 분리배출도 의미 있지만 교회와 성도들이 생각을 모아 새활용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면 ‘죽어가는 물건’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줄 뿐 아니라 지구도 살리는 의미 있은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소통을 통한 계획 및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국내외의 교회나 기독교단체들은 교회의 실천방안을 알려주는 다양한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위의 자료도 그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교회의 환경과 상황 및 구성원의 특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로 토론하고 논의하여 정하는 것이 더 좋다. 논의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없도록 교회 내 소통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계획과 목표가 세워질 때 성도들의 자발성과 참여가 더욱 지속적일 수 있을 것이다. 

     

    3.3.5 건물/건축

     

    친환경 건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은 친환경건물 인증제도를 시행 중이다. 영국의 BREEAM, 프랑스의 HQE, 일본의 CASBEE 등 여러 인증제도 가운데 미국의 녹색건축위원회(USGBC)에서 개발한 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의 건축환경에 맞게 녹색건축인증제도(green standard for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 GSEED)를 시행한다. 나라별로 녹색건축인증기준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대체로 생태환경과의 지속가능한 관계, 효율적인 물과 에너지 사용, 자재와 자원, 실내환경 등을 고려하며 이루어진다. 

     

    미국의 키스톤 커뮤니티 교회(Keystone Community Church)는 세계 최초로 미국의 녹색건축인증(LEED)을 받은 교회이다. Keystone Community Church는 창조세계에 대한 존중과 청지기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 설계과정 초기부터 LEED 인증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교회는 자연적으로 통풍이 잘 되어 건물 안에 맑은 공기가 자연적으로 순환하게 설계되었으며 통유리를 사용하여 자연채광을 극대화하였다. 또한 건축과정에서도 재활용되고 지속가능한 자재를 최대한 사용하려고 노력하였고, 환경적으로 안전하고 생태를 고려하는 인테리어를 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전거 거치대, 전기자동차 충전소를 설치하였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이 주변 저수지나 숲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여과시스템을 마련하는 등 주변 생태계와의 관계도 고려하였다. 이러한 교회 설계와 건축은 교회의 모든 활동에서 교인들이 생태적으로 사고하고 결정하도록 이끌었으며 환경적 조건과 영향은 교회가 하는 활동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고려해야 할 사안으로 자리잡게 해주었다.[36]

     

    환경친화적인 교회 건물이 주목받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교회 가운데 녹색건축인증을 받은 곳은 매우 적다(평동교회). 하지만 앞으로 리모델링이나 신축을 계획 중인 교회는 자연자원을 보호하고, 유해한 물질을 사용하지 않으며, 에너지 효율을 고려하는 건물과 인테리어 및 공간사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지역사회 녹색건축의 모범이 되고 자연 및 지역사회 모두에게 친화적인 공간이 될 때, 교회는 동시에 물리적, 정서적, 교육적, 윤리적으로도 주목받는 장소가 될 것이다. 

     

    3.3.6 탄소흡수원

     

    탄소흡수는 왜 중요한가. 탄소중립에서 탄소흡수원(Carbon sinks)의 역할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배출된 탄소를 흡수하고 저장하여 온실가스 배출을 부분적으로 상쇄하는 역할을 하며 산림이 탄소흡수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숲의 탄소 흡수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숲 관리와 복원에 힘쓴다. 그런데도 기후변화로 인한 사막화, 산불의 증가, 산림병해충 확산, 산사태 등으로 인해 숲이 위협받는다. 또한 목재는 나무가 평생 흡수한 탄소를 저장하므로 부가가치가 높고 수명이 긴 용도로 활용해야 한다. 

     

    최근에는 해양의 탄소저장능력이 주목받는다. 해양생태계가 탄소를 흡수하는 활동을 가리켜 블루카본(Blue Carbon)이라고 한다. 해양의 탄소흡수 및 저장능력은 복잡한 해양생태계의 먹이사슬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해양생태계의 보존 및 복원도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제1차 갯벌 등의 관리 및 복원에 관한 기본계획(2021~2025)을 세워 블루카본에 대한 사업을 시행 중이다.[37]

     

    교회는 탄소배출량 감축 외에도 탄소흡수를 통한 배출량 상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핀란드 루터교회(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Finland, ELCF)는 2001년부터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운영하는데 이들 교회가 발표한 ‘탄소중립교회 2030(Carbon Neutral Church by 2030)’은 탄소흡수에 대한 항목을 포함한다. 이들은 먼저 교구가 소유한 토지(특히 숲과 습지)의 탄소저장 현황을 평가하고, 생태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방법을 통해 교구가 숲의 탄소저장흡수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추진 중이다.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 또한 체계적으로 교회의 탄소흡수를 추진하고 있다. 2019년 발행된 Energy Footprint Tool(EFT)은 약 5천 개의 교회 에너지 사용 관련 데이터를 제출하였고, 이 가운데 5%의 교회는 이미 순제로(net-zero carbon)를 달성하였고, 전국적으로 12.5%의 탄소감축이 이미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EFT는 제출된 자료를 토대로 영국교회가 에너지 사용을 통해 배출하는 탄소의 순배출량은 185,000tCO₂e라고 발표하며 영국교회가2030년까지 감축해야 할 양이 어느 정도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실천으로 LED 교체사업, 태양광 설치, net-zero carbon 학교/교회 만들기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 중이다. 영국교회는 2021년 6월 Hereford Cathedral이 1000번째 생태교회로 지정되었다고 밝혔다.[38]

     

    창조의 하나님은 정원을 만들고 돌보시는 분이다. 창조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각종 식물과 동물을 만드셨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수준에서부터 우주적 스케일의 거시적인 수준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먼 우주뿐 아니라 아직 우리가 사는 지구의 심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끊임없이 돌보시며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 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에 공동창조자로서 부름을 받았다. 청지기는 단순히 돌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하나님을 가장 닮은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할 때이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세상을 잘 돌보며 생명의 풍성함과 다양성을 강화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신 것처럼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신 것처럼, 각 교회는 자신들의 크고 작은 정원과 동산들을 조성하여 창조주이자 정원사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배출한 탄소는 교회가 상쇄하는 것은 기후위기로 위기에 처한 지구와 취약계층에게 책임져야 할 마땅한 도리이다. 최근 ‘탄소헌금’을 하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헌금은 사막화가 진행 중인 몽골에 나무를 심는 일 등에 사용된다. 하지만 교회가 숲을 가꾸고 보존하는 활동을 통해 자신이 배출한 만큼의 탄소를 흡수하여 상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배출하는 탄소배출량을 알아야 한다. 막연하게 나무를 심는 행사를 하기보다는 먼저 교회, 노회(연회) 단위의 탄소배출량을 계산하고 그에 따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좋다. 프로젝트의 현실성과 지속성을 위해 핀란드와 영국의 교회는 구체적인 실천에 앞서 전국적으로 교회의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고 에너지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다. 이는 탄소흡수가 한두 개의 교회가 부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교단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3.3.7 환경교육

     

    환경교육은 평생교육이다. 환경교육을 어린이·청소년·청년 주일학교 교육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환경교육은 그 속성상 나이가 어릴수록 교육효과가 훨씬 더 크게 발현되는 경향이 있지만, 환경교육은 기본적으로 전 연령대 교인들을 향한 보편의 교육 주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환경교육은 실천 및 활동에 집중하는 교육이다. 강의를 듣고 공책에 메모하는 방식의 교육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후위기는 개인적 실천 못지않게 사회적 실천, 나아가 전 지구적 실천이 촉구되는 주제다. 

     

    환경교육은 희망을 일깨우는 교육이다. 환경교육에 참여한 학습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기후우울증 같은 증상을 나타낼 수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우울감에 빠지지 않도록 작고 사소한 실천일지라도 절대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며 서로서로 격려하는 환경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환경교육은 학습자의 자발성, 자율성을 자극함과 동시에, 희망을 일깨우는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환경교육은 이 세상에 대한 책임과 사랑과 결심을 교육하는 활동이다. 탄소중립&기후교회를 교육목표로 하는 교회의 환경교육은 기독교인 개인의 심성교육 차원을 넘어 인류공동체의 정치적 역동에 적절히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여성 정치사상가의 교육에 대한 개념정의를 소개한다. 교육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정도로 충분히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지 결정하는 지점(point)”이며, 또 “새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 없이는 피해갈 수 없는 불가피한 파멸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낼지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39]

     

    환경교육은 개인에서 시작하되 개인에만 머물지 않는 교육이다. 지구는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로 조건지어져 있다. 지구의 어느 한 지점에서 발병한 코로나19 전염병이 그곳에만 제한적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를 여실히 확인한 바 있다. 그러므로 국지적 자연재해를 접할 때도 지구 행성 전체를 늘 염두에 두며 그 원인과 영향을 사색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환경교육은 국제공조를 염두에 두는 교육이다. 지구상 어느 한 나라가 홀로 탄소중립을 달성한다고 해서 기후위기가 완화되는 게 아니다. 지구의 대기권은 전 지구가 함께 누리며 영향을 주고받는 공통 환경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온 나라들이 기후위기 관련하여 국제회의로 빈번히 모여서 각국의 탄소중립 진전상황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환경교육 프로그램은 국제공조와 국제협력(내 나라 안에서의 공조와 협력은 물론!)에 관하여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교육주제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여야 한다.

     

    환경교육은 민주주의적 대화모임의 형태를 취한다. 독재자 한 명이 나타나 강제로 일사불란하게 명령해서 환경을 보호하면 효과가 확실하지 않겠는가 하는 아이디어를 주의깊게 경계하여야 한다. 에코파시즘(ecofascism)의 침투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 환경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비록 더딜지라도 민주주의적 의회정치와 국제협력을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환경교육은 교회 단위, 마을 단위로 전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 은평구의 한 교회는 지방자치단체와 연대하여 탄소금식을 하고 있다. 또, 교단을 넘어 동일 지역에 위치한 교회들끼리 ‘녹색교회’를 선언하고 교회 단위로 연대를 모색하는 사례가 점차 많아지는 추세다. 교단의 노회나 총회 전체의 종합적, 포괄적 움직임도 물론 중요하지만, 꼭 노회나 총회의 결정이 전제되어야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 좋은 예가 앞에서 한 번 언급했던 꿈마을엘림교회라고 할 수 있다.[40] 지역사회 내 교회들의 연합활동과 이 연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관련해 더 많은 사례와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울러 기후위기에 특화된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탄소중립 기후교회워크숍’ 관련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에 문의할 수 있다. 

     

    환경교육은 메시지 중심으로 소통하는 교육이다. 탄소발자국, 탄소중립, 탄소제로, 지속가능한 지구, 생물다양성, 자원순환, 퇴비화, 쓰레기 재활용(reusing) 및 새활용(upcycling), 제로웨이스트(zero-waste, 낭비 없는 삶), 육식과 채식, 에너지 전환 등의 환경 관련 용어들이 교회 안에서 거리낌 없이 언급될 수 있는 자율적, 민주적 분위기를 갖추면 좋다. 이른바 기독교 교리로 정해진 개념이 아니라 할지라도 ‘메시지’ 면에서 기독교 교리와 상통한다면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환경교육 관련 개념들이 부드럽게 소통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다. 

     

    환경교육은 기존하는 교회조직을 활용할 수 있다. 교회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대면모임이 어렵긴 하나) 1주일에 한 번씩 정규모임을 열 수 있는 기본구조를 이미 보유하고 있다. 구역이나 속회, 혹은 셀과 같은 작은 단위 조직들도 촘촘히 탄탄히 짜여있다. 그와 같은 단위 조직들을 활용하여 환경교육을 실시하면 교육효과가 지속적일 수 있다. 

     

    3.3.8 예배와 설교

     

    오늘날 기후위기는 사회의 위기이자 교회의 위기이므로, 교회는 교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교회 또한 사회와 마찬가지로 지구환경 안에, 지구환경 덕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 예컨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 시대와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였다는 사실을 각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말씀선포 주제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회참여적이었다. 그분들은 한 나라의 국가정책뿐 아니라 외교정책에도 참여적이었다. 왕실을 향해 직접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대예언자들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대중 사이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호세아, 아모스, 스가랴 등 소예언자들도 하나같이 당대 사회의 위기상황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오늘의 교회(목회자뿐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그리하여야 한다. 특히 작금의 사회문제 중 하나인 기후위기에 대하여 비판적 관심, 참여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 내 설교와 성경공부는 기후위기 주제와 연결될 수 있다. 물론 성경 안에서 기후위기나 탄소중립이라는 주제를 직접 다룬 본문을 얼른 찾아낼 수는 없다. 성경시대에는 기후위기나 탄소중립이라는 현대적 용어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콕 집어 해당 용어가 사용되지만 않았을 뿐 성경의 메시지가 기후위기 같은 지구환경의 부정적 변화, 불의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응행동에 관하여 절대 무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일어섰던 예언자들의 발언과 활동에 대한 기록이 성경 안에 무수히 많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기후위기환경의식은 대체로 높은 사회참여적 수준을 보인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하여 2022년 4월~5월에 걸쳐 진행한 기후환경 관련 의식조사 결과(표본오차 신뢰수준에서 ±3.1%), 기후환경운동을 ‘하나님나라 구현을 위해 꼭 필요한 선교의 한 종류이다’라고 보는 목회자가 47.1%, 목회활동의 필수사항으로 수긍하는 목회자가 50.1%로 드러났다.[41]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항목은 이 조사에서 기후위기 관련 캠페인이 교회나 노회(연회) 차원에서 열리면 참여하겠다는 교인의 비율이 무려 93.5%로 나타난 것이다.[42]

     

    코로나 팬데믹 시대, 목회자들은 온라인 설교 방법론뿐 아니라 설교 콘텐츠 자체를 고민하여야 한다. 요 몇 년 사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적합한 온라인 설교방법론을 여러 목회자가 두루 모색하고 있다.[43] 그런데 기후위기는 코로나 팬데믹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협이므로, 긴박한 위기감과 경계심을 갖고 기후위기를 주제로 하는 설교 콘텐츠 자체를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설교 콘텐츠로서 ‘창조신앙’은 기후위기라는 주제와 잘 어울린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의 조건(빛, 물, 땅, 여러 생물 등)을 이 지구 위에 갖춰주셨다. 지구라는 행성의 특징과 속성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인간 및 다른 생명체들의 삶에 최적화되었는지 묵상할 수 있다. 

     

    설교 콘텐츠로서 ‘이웃 사랑’은 기후위기와 연결하여 풀이할 때 훨씬 의미가 넓어지고 깊어진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웃 사랑은 끼리끼리 모여 유사점과 동질감을 충분히 만끽하며 즐겁게 사랑하는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받았다(마5:44). 끼리끼리 이웃 사랑을 나누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까지도 이웃으로 느끼고 사랑하여야 한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인간 종족 아닌 여타의 동식물 종족들도 이웃으로 느끼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이웃 사랑’을 주제로 설교할 때마다 이렇듯 이웃의 범주를 계속해서 넓혀가며 생각하도록 설교원고를 작성한다면, 기후위기, 탄소중립, 생물다양성, 환경운동이라는 단어를 굳이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교인들의 마음속에 이웃 사람 및 이웃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 관련 설교를 고민하고, 성경공부 운영을 고민하는 목회자들이 참고할 자료들은 다양하다. 우선 “탄소중립, 녹색교회, 생명목회라는 새 비전을 품은 채 삶과 신앙의 영역에서 우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격려하는 책, 『기후위기시대의 도전과 교회의 응답』을 참고할 수 있다.[44] 그리고, “성서신학이 고대 근동학이나 고고학의 한 분야에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현대의 신학적 의미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를 품고서,[45] 여러 성서신학자가 연합하여 집필한 『성서, 생태위기에 답하다』와 같은 저서도 참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송준인 박사(청량교회 담임목사)가 “생태위기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집필한 기독신문 연재 글도 참고하기에 유익하다.[46] 

     

    기후위기를 불러온 인간의 역사적 죄과를 묵상하고 생태영성을 북돋우는 특별 예배 프로그램 혹은 기도회를 기획할 수 있다. 야외예배를 활용할 수 있고, 창조절 예배를 창의적으로 구성하여 드릴 수도 있다. 특별 예배 프로그램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얻으려면 각 교단의 환경위원회에 문의하거나,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 문의하면 된다. 

     

    생태영성 걷기기도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다. ‘지구와 나’의 관계를 묵상하며,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자연환경을 얼마만큼 많이 훼손해왔는지 묵상할 수 있는 영성 프로그램으로서, 몸을 움직이면서 또 여럿이 함께 걸으면서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걷기와 쓰레기 줍기(‘플로깅/Plogging’) 활동 프로그램과 병행할 수 있다. 관련자료 및 안내서가 필요한 교회는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이나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에 문의하면 플로깅 프로그램과 걷기 기도 프로그램에 필요한 안내서를 제공받을 수 있다. 

     

    3.4 결론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교회와 신학이 환경문제에 대해 취해온 인식과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 삶과 가치의 변화를 요구하는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 사례들을 제안해보았다. 종합해보면 한국의 교회와 신학은 환경문제를 비롯한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미미한 단계에 있지만, 아래로부터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반갑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신학적 입장의 차이와 교회적 상황의 다양성 때문에 교회들이 합의된 매뉴얼에 따라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도, 교회 안팎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통해 기후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변화들이 크고 작은 규모로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본 연구는 교회가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해 참조할 만한 국내외의 자료와 사례들(지면관계상 국외 사례 생략)을 소개함으로써 교회가 탄소중립 실천방안을 스스로 찾고 구체화하게 하였지만 본 연구가 소개하고 제안하는 자료와 사례들이 한국교회 현장에서 적절하게 적용되고 상황에 맞게 더욱 발전하도록 도울 여러 실험적 시도와 연구도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교회들이 탄소중립에 관심을 두고 참여해야 할 당위성과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탄소중립 활성화를 위해 향후 한국교회가 고민하고 고려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환경이나 기후위기와 같은 문제와 관련된 경험이 아직은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자료와 정책이 만들어져도 교회 현장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다양한 사례와 그에 대한 평가를 통해 교회 현장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는 현장중심의 경험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의 탄소중립을 위한 새로운 전략들이 교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볼 실험적 연구도 필요하다. 기후변화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곳곳의 환경운동 현장에는 많은 기독교인과 교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과정과 성과들이 기록되고 공유되는 일이 비교적 드물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들의 경험과 사례가 서로 공유되고 상호교류가 이루어진다면 한국교회의 탄소중립 효과는 이전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이 지역별, 권역별로 진행하는‘환경선교사 양성과정’이나 생태환경 교육활동가들이 직접 찾아가 진행하는 ‘살림스쿨’ 등은 교회가 지역사회와 함께 환경문해력을 높이고 기후위기에 대해 공감할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경험과 방법을 공유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할 추진력을 더해줄 수 있으니 참고하기를 바란다. 

     

    둘째로 교회의 탄소중립 실천은 구성원들의 참여와 자발성이 전제될 때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교회가 탄소중립으로 가기 위해 교회 내의 소통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기독교환경운동은 더 이상 특정 인물이나 특정 단체 혹은 특정 사안에 의존하고 집중되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는 삶의 모든 영역을 위협하는 전 지구적 현상이 되었고 그 누구도 이 위험에서 배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안의 모든 구성원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기후위기 문제를 신앙적으로 성찰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기후위기 문제를 성찰하고 적용하도록 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모아내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의 공감을 토대로 한 지속적인 참여와 관심은 한국교회 탄소중립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각 부서와 모든 연령층의 관심사가 반영된 계획은 수용성 및 지속적 실천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기후위기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어린이, 청소년, 청장년들의 생각과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프로젝트를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의 목소리에 더 신중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호소하는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이 증가하고 있다. 현재 정치권과 사회제도는 이들의 위기를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창조신앙과 복음을 통해 이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두려움과 좌절을 위로해주며 창조세계의 회복과 하나님나라 건설에 헌신하는 사명자들로 세워갈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탄소중립을 향한 교회의 발걸음은 단순히 환경적 요소만을 고려한 교회의 캠페인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교회의 탄소중립은 교회 내 민주적 소통 및 교회와 지역사회 간의 협력이라는 측면에서 교회개혁의 가능성도 포함하며 교회와 지역사회의 민주적 시민의식을 높이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탄소중립은 더 이상 자연환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문제인 만큼 한국교회가 탄소중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한국교회는 지역사회 및 세계의 시민으로서 기독교적 가치와 정신을 전파하는 의미 있은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1] Lynn White,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155(1967), 1203–1207.

    [2] 성영곤, “생태위기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재고찰,” 서양중세사연구 제19호(2007), 3–4.

    [3] 서남동, “생태학적 신학서설,” 기독교사상(1970. 10), 88–89.

    [4] 서남동, “생태학적 윤리를 지향하며,” 기독교사상(1972. 5), 142.

    [5] 옥필훈, “생태계 회복을 위한 기독교환경운동과 선교신학적 발전과제,” 종교문화학보 제12집(2015), 20. 

    [6] 이창호, “생태신학 유형 연구: 하나님 이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 그리고 세계의 존재들 사이의 관계성을 주된 논점으로,” 기독교사회윤리 제52집(2022), 349. 

    [7] 이승구, “생태신학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 신학정론 제40권 1호(2022), 137–138. 

    [8] 유석성, “생태학적 위기와 환경윤리,” 신학과선교 제19권(1995), 239–240. 

    [9] 옥필훈, 20–21.

    [10] 이정배, “유교적 자연관과 생태학적 신학=유교와 기독교, 만남의 새 지평,” 신학과세계 36호(1998).

    [11] 장윤재,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 신학사상 제171집(2015).

    [12] 김은수, “생태적 위기와 선교적 과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30집(2003), 530.

    [13] 이명석, “생태학적 신학의 발전에 대한 탐구와 선교적 적용,” 복음과선교 제50집(2020), 249. 

    [14] 유미호, “한국개신교 환경운동의 역사와 현황,” 종교사회단체들의 환경활동 활성화에 관한 연구. 환경부 용역 보고서(2001). 

    [15] 이명석, 257. 

    [16] 김신영,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한국기독교환경운동가의 특성: 개신교 목회자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학위논문(2019), 27–28. 

    [17] 조성애, “한국사회와 기독교의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 연구: 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 유출사고 언론보도를 중심으로,” 숭실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8), 12–15; 67–70. 

    [18] 크리스천투데이 2012년 3월 12일자 기사.

    [19] 한국기독공보, 2002년 4월 13일자 기사; 국민일보, 2008년 7월 3일자 기사; 당당뉴스, 2011년 6월 28일자 기사; 아름다운동행, 2016년 6월 5일자 기사.

    [20] 임희모, “몽골 ‘은총의숲’ 생태선교: 북한 산림녹화 생태선교에 주는 함의,” 선교와신학 제27집, 69–70.

    [21] 한국기독공보, 2022년 4월 11일자 기사

    [22] 노컷뉴스, 2021년 3월 9일자 기사

    [23] 노컷뉴스, 2022년 2월 15일자 기사

    [24] Biehl Janet and Peter Staudenmaier. Ecofascism: Lessons from the German Experience(Edinburgh: AK Press, 1995), 김상영 옮김, 『에코파시즘: 독일 경험으로부터의 교훈』 (서울: 책으로만나는세상, 2003), 22. 

    [25] Anthony Giddens, The Politics of Climate Change(Cambridge: Polity, 2009), 홍욱희 역, 『기후변화의 정치학』(서울: 에코리브르, 2009), 16. 

    [26] Jared M. Diamond, 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New York: Viking, 2005), 강주헌 옮김, 『문명의 붕괴』(파주: 김영사, 2005), 32 

    [27] 유미호, “창조의 부르심과 ‘탄소제로 녹색교회’”2021년 8월 21일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고글. https://cemk.org/22407/ 검색일2022.7.25.

    [28] 유미호, 이인미, 『환경 살림 80가지』(서울: 신앙과지성사, 2022), 191.

    [29] 전력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배출량의 약 36%를 차지한다. 대한민국2050탄소중립전략(2017), 51.

    [30] 교회가 태양광발전을 이용하여 교회 사용 전력의 일부 혹은 전체를 생산하는 사례는 https://www.resonant.energy/houses-of-worship-stori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31] 한국기독공보, 2022년 5월 11일자 기사.

    [32] 대한민국2050탄소중립전략, 68.

    [33] https://greenchurches.ca

    [34] Green Peace (2022), “4 Myths about industrial agriculture,” https://www.greenpeace.org/international/story/49981/myth-industrial-agriculture-food-climate-health/ 검색일2022.07.26. 

    [35] World Animal Protection. US (2022), More Than 200 Million Pounds of Pesticides in U.S. Are Applied to Crops Grown to Feed Animals on Factory Farms. https://biologicaldiversity.org/w/news/press-releases/new-report-more-than-200-million-pounds-of-pesticides-in-us-are-applied-to-crops-grown-to-feed-animals-on-factory-farms-2022-02-22/ 검색일 2022.7.27.

    [36] Grand Rapids Business Journal (2006. 3. 27.), “First LEED Church of America,” https://grbj.com/uncategorized/first-leed-church-of-america/ 검색일2022.07.26.

    [37] 해양수산부(2021.10.20.), 제1차 갯벌 등의 관리 및 복원에 관한 기본계획(2021~2025), https://www.mof.go.kr/article/view.do?menuKey=375&boardKey=9&articleKey=43491. 검색일 2022.07.27.

    [38] The Church of England (2021.12.02.). “One year on: Church moves forward on carbon reduction target,” https://www.churchofengland.org/news-and-media/news-and-statements/one-year-church-moves-forward-carbon-reduction-target 검색일 2022.07.27.

    [39] Hannah Arendt,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The Viking Press, 1961), 196.

    [40] 기독교환경교육센터살림블로그, 글번호1222.

    [41] 기독교환경교육센터살림·교회와사회연구소·이음사회문화연구원·효산건강환경재단 공동주관(2022), 포럼자료집, 제6회 생태신학포럼. 23.

    [42] 기독교환경교육센터살림·교회와사회연구소·이음사회문화연구원·효산건강환경재단 공동주관(2022), 포럼자료집, 제6회 생태신학포럼. 24.

    [43] 손동식, “코로나19 시대와 효과적인 온라인 설교에 관한 연구,” 대학과선교 제45집(2020).

    [44] 고재백·유미호·조영호 외, 『기후위기시대의 도전과 교회의 응답』(서울: 새물결플러스, 2022), 21.

    [45] 강철구·구자용 외, 『성서, 생태위기에 답하다』(서울: ㈜한국학술정보, 2022), 서문.

    [46] 송준인, 기독신문 특별기고(연재), “생태위기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767 검색일 2022.8.6.

     

    김신영, 이인미, 유미호(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eco-chr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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