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사능 공포와 정부의 ‘안전 주술’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조회 수: 4950, 2011.03.18 15:13:14
  • 방사능 공포와 정부의 ‘안전 주술’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두렵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연이은 폭발과 화재, 격납용기 파손, 사용후 핵연료 노출 등 시시각각 들려오는 소식은 인간이 자연을 제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원전 사고가 다른 어떤 것보다 무서운 이유는 우리의 감각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위험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지속된다는 데 있다. 하지만 공포감을 주는 건 ‘판도라의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성 물질만이 아니다. 더 끔찍한 것은 대중을 안심시킨다는 명분으로 ‘안전하다’라는 말만 되뇌는 기술 관료주의자들의 카르텔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형 원자로는 일본 원전보다 안전하다는 정부와 핵산업계의 일방적인 주장이 시작됐다. 편서풍이 불기 때문에 원전 노심이 100% 녹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우리나라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기상예보에는 늘 불확실성이 있다던 기상청은 ‘일본에서 누출된 방사성물질이 한반도까지 날아올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한 방송에 출연한 원자력공학자는 ‘체르노빌은 지금 동식물의 천국’이라며 방사성물질 누출이 미칠 파장을 호도하기에 급급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이들의 태도는 지구 저편에서 유럽의 국가들이 취하고 있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독일은 원전 수명연장 계획을 연기하고 노후 원자로 7기의 가동을 중단했다. 스위스는 신규 원전 건설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외국의 대다수 전문가들은 최악의 경우 방사성물질 낙진이 북반구 전체로 확산될 수도 있다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국제민간항공기구 산하기관인 화산재예보센터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 5개국을 포함한 10개 지역 상공에 방사능 경보를 내린 상태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우리가 이번 사태로 방사선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정부가 내놓는다는 반응이 고작 ‘풍향 타령’이라면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우리만은 안전하다’고 속삭이는 그 목소리들은, 과학이 아니라 맹목적인 주술에 가깝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운 교훈은 자연계에서 ‘가능성 제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방사성물질 낙진은 유럽 전역은 물론, 사고지역에서 8000㎞나 떨어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도 검출됐었다.

     

    지금 우리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사태는 사상 초유의 재난임에 틀림없다. 문명의 역사에서 지진과 쓰나미, 원전사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례는 없었다. 1954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원전이 가동된 이래 사고는 부지기수로 있었지만, 방사성물질이 4개의 원자로에서 동시에 누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로 두려운 것은 원자로 내부에 저장된 사용후 핵연료들이 완전히 노출돼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사태다. 그리 되면 세계는 체르노빌 재앙을 능가하는 방사능 공포에 전율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모든 정부부처와 정당, 시민단체를 아우르는 비상대책본부를 구성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이다.

     

    이제 세계의 운명은 후쿠시마 원전에 남아 사투를 벌이고 있는 70여명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린 기억해야 한다. 체르노빌에서 제염작업에 동원되었던 어린 병사들이 ‘영웅’ 칭호와 함께 비참하게 죽어갔음을. 그리고 이 끔찍한 재앙이 구소련의 개방을 재촉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사실을.

     

    (2011.03.17, 경향신문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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