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자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조회 수: 392, 2023.01.16 20: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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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4기후정의행진을 가다

     

    2019년 기후위기비상행동 행진 이후,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대규모 집회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으로 근 이년 간 기후활동가들은 비대면, 소규모, 온라인 활동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3년이 흐른 지금, 드디어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기후 운동이 위축된 시기에도 많은 성과가 드러났다. 지자체들의 기후위기 비상선언이 이어졌고, 기후변화의 심각성은 일종의 상식으로 사회에 자리 잡았다. 기후위기가 내포하고 있는 ‘불평등’은 이상기후로 인한 사회취약계층 인명피해로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았다. 위기의식은 확산하였으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시스템의 변화는 지지부진했다. 친환경 전기 자동차, 그린리모델링, ESG 경영, 그린뉴딜과 같은 그럴듯한 단어와 정책들이 나타나고 기후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점점 묻혔다. 변하지 않는 세상을 뒤흔들기 위해선 잔잔하게 이어왔던 기후정의 연대 물결을 큰 파도로 합치는 일이 필요했다.

     

    굳어있던 세상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 924기후정의행진이었다. 2022년 6월부터 ‘9월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가 꾸려졌고, 지역 곳곳에서 행진 참여를 독려하고 행동을 예열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기후위기를 말하는 오픈 마이크, 시 낭송과 노래, 토론회 등 각종 행사가 거리를 채웠다. 기후정의행진 웹사이트와 SNS에는 기후위기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비인간 동물의 연대 소식이 올라왔다. 부산, 울산, 경남, 광주, 전북, 지리산권, 충북… 상경단을 꾸린 지역을 표시하면 지도를 꽉 채울 정도였다. 나의 문제,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이 눈앞에 이미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확장되고 있었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연대의 장면이 벌써 예고되었다. 그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고 싶었다. 내가 924기후정의행진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한 이유였다.

     

     

    흐려진 진심이 부끄러웠다

     

    아침 6시 알람이 울렸다. 안경 닦이와 손수건, 뜨거운 햇빛을 막아줄 바람막이, 공룡 얼굴이 박혀있는 크로스백을 챙기고 벽에 걸린 캔버스 하나를 쳐다보다가 배낭에 쑤셔 넣었다. 기후정의행진 부산 상경단 버스를 타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2020년 부산기후용사대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 집회여서 조금 마음이 떨렸다. 원래 행진의 출발 장소였던 광화문 광장에 집회가 불허되었기 때문에, 일부러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버스 의자의 안전벨트를 매면서 부디 안전하게, 아무도 다치지 않고 평화롭게 행진이 마무리되길 바랐다.

     

    서울로 가는 길 내내 덜컹거리는 버스 움직임에 멀미를 느끼면서도 캔버스에 그려진 하늘과 흰색 데이지꽃을 계속 노려보았다. 며칠 동안 정성 들여 그린 그림 위에 피켓 문구를 쓰겠다고 들고 온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진심을 담은 문구를 적고 싶었는데 집회 장소인 서울 시청 앞에 도착하기 30분 전까지도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적을 말이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왜일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기후위기 앞에서 절박하지 않다. 아니, 절망이 가득 찼기 때문에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몇 시간을 고민하고 겨우 써넣은 것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위해, 지금 당장 기후정의’였다. 크레파스를 덧칠해도 글자는 선명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잔뜩 흐려진 진심처럼 보여서 부끄러웠다. 기후활동가로 알려지고 나서 사람들에게 미래세대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2021년이었다면 억울함과 분노, 변화에 대한 욕구를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뚜렷한 방향과 해결방안을 내놓을 수 없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개발사업과 일방적인 정부의 결정, 의미를 잃어버린 거버넌스, 파괴에 무감각한 사람들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서 외면하고 있다. 마음이 휘청거린다. 그렇지만 에너지가 없다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해서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생명들의 터전, 갯벌을 지키기 위해 신공항 건설 반대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핵발전소, 석탄화력발전소 인근에 살며 가족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주민들이 있다. 미래의 가능성을 박탈당했다며 기업과 정부에 책임을 묻고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와 일할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목소리를 듣고 함께 구호를 외치는 일이었다.

     

     

    사랑의 가을을 목격하다

     

    집회가 열릴 서울 시청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부터 거리에 들뜬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집회와 관련 없어 보이는 사람들 틈에서 ‘기후위기’, ‘살고 싶다’라는 글자가 적힌 피켓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누군가는 피켓을 목에 걸고, 누군가는 온몸에 풀을 두른 독특한 분장과 가면까지 착용하고 집회 장소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집회 현장과 가까워지자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거리 곳곳에서 미니 집회와 서명운동이 진행됐고, 자유발언과 공연으로 크고 작은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티셔츠에 ‘지구는 안 망해 우리가 망해’, ‘원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와 같은 문구를 새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말 그대로, 지구와 삶을 사랑하는 비주류(非主流)들의 축제였다. 본래 우리의 놀이판이었던 광화문 광장은 집회 불허로 권력에 빼앗겼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곳이 곧, ‘광장’이었다. 시민들의 능동적 정치 행위의 공간, 광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본집회가 시작되자 기후위기 투쟁 최일선에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아끼지 않고 박수와 응원의 함성을 보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마크와 형형색색의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끊이지 않는 행진 대열, 가슴을 쿵쿵 울리는 북소리와 장구 소리가 꿈처럼 느껴졌다. 트럭 위에서 절박한 심정을 토해내는 사람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청소년 기후활동가의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분노하고 구호를 외쳤다. 

     

    더 많은 사람을 행진 대열에, 기후정의 운동에 포섭하기 위해선 덜 급진적이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체제전환’만큼 우리의 요구를 대변하는 말이 없다. 모든 혐오와 차별이 지금의 불평등한 사회·경제체제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체제전환, 투쟁, 운동, 반란과 같은 단어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는 사회가 ‘비주류(非主流)’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924기후정의행진은 여기에 반대로 ‘화석연료와 생태파괴를 일삼는 체제를 종식하자’는 구호로 ‘비주류(非主流)’에 속해있던 몸과 언어들을 ‘주류(主流)’로 치환했다. 서로 다른 경험을 지닌 기후위기 그리고 불평등의 당사자들이 소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공간을 제공하였고 집회는 내뱉어진 단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소수의 요구가 하나로 뭉쳐 거대한 물결이 되고, 켜켜이 쌓여온 한이 풀어지는 굿판이 될 수 있었다. 여름의 한낮처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었던 그날 총 3만 5천 명의 사람들이 924기후정의행진에 함께했다. 

     

    1967년 여름, 10만여 명의 히피들이 모였던 미국의 헤이트애시베리(Haight Ashbury) 거리가 떠올랐다. 히피들은 ‘음악·사랑·꽃’을 윤리로 내세우며 소비지상주의를 거부하고, 인종주의와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고, 기존 사회 질서에 반대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했다. 평화운동으로서 촉발된 히피 문화는 이후 반체제, 반문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 시기는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2022년 9월 24일,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렀던 시간을 감히 ‘사랑의 가을’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미래라는 거대한 캔버스 

     

    새해가 왔다. 시간은 연속적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2023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새로운 마음을 먹는다. 바쁜 일상 때문에 뒤로 미뤄뒀던 일의 목록을 다시 꺼내고 하나씩 이뤄가는 찬란한 미래를 그린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어야지. 매일 30분 이상 운동해야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어야지… 수많은 다짐과 소망 사이에서 혁명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세상을 관찰하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를 이끌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한다. 붓과 물감을 들고 미래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일상에 기후정의가 닿을 수 있을까?’

    ‘기후정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기후정의는 ‘기후위기가 초래된 원인을 고려하여 그 책임의 공평한 분담과 기후 취약계층의 우선적 배려(분배적 정의), 온실가스배출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생산구조의 변경(생산적 정의), 기후정책 수립 과정에서 국민의 참여와 의견 반영(절차적 정의), 국민은 물론 생태계와 미래세대, 국내는 물론 지구적 차원까지 고려(인정적 정의)해야 하는 가치나 지향점’1)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후정의를 삶에서 실현하기 위해선 ‘개념적 정의’를 뛰어넘어 생각해야 한다. 다양한 당사자의 이야기가 기후정의 운동을 전개하도록 해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처럼 기후위기 피해 당사자의 발화가 기후 부정의를 드러내고 문제 해결의 주체를 조명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기후정의가 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발언이 막히는 일이 없도록 발언장소의 장벽을 낮추어야한다. 기후위기는 소수의 전문가가 모여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924기후정의행진의 구호처럼 ‘우리가 길이고 우리가 답이다.’ 기후정의를 딱딱하게 정의되는 개념이 아닌 살아있는 복잡한 생명체처럼 생각하고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연결하는 굿판으로, 기후정의 ‘축제’로 지역 곳곳에서 계속 이어가야 한다. 2023년 9월 24일 하루만 기다릴 이유는 없다. 우리에겐 힘이 있고, 해야 할 일도 많다.

     

    빈 캔버스 앞에서 망설인 시간 동안 물감이 굳어버렸다. 바싹 마른 붓을 물에 씻으니 머금은 물감이 점점 연해졌고, 어렵게 그려낸 미래도 흐릿한 형상을 띤다. 기후 부정의 앞에서, 변할 기색 없어 보이는 세상 앞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혼자서 미래를 그리는 일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는다. 미래라는 캔버스는 모든 사람의 모든 그림이 겹겹이 쌓여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그린 옅은 그림에 당신의 그림이 겹치고,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거듭 선명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1)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정책 개선방안 연구(Ⅰ), 한상운 외 12명.  2019.12. 한국환경연구원

    2)  다중음격 162회: 50년 전 아름답게 뜨거웠던 순간, 사랑의 여름, 2017.08.09.,

    멜론  https://www.melon.com/musicstory/inform.htm?mstorySeq=5340&startIndex=0 

    3)  924기후정의행진 http://action4climatejustice.kr/38

     

    곽다희 부산기후용사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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