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시브기술 이야기를 시작하며: 파시브기술의 개념과 종류, 특성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조회 수: 2573, 2019.10.24 14:25:15
  • 인간의 삶은 기술 위에서 펼쳐집니다. 화석연료와 원자력을 쓰지 않는 사회로 전환하는 길에는 기술에 대한 고찰이 꼭 필요합니다. 재생가능에너지 100%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태양광 발전이나 풍력 발전과 같은 재생가능에너지원 기술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시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매달 1천만 원을 벌지만 항상 6~7백만 원은 길에 흘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늘 돈을 흘리기 때문에 1천만원 벌어도 3~4백만 원어치 생활수준밖에 누리지 못합니다. 많이 버는 것보다 돈 흘리지 않는 게 더 시급한 과제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재생가능에너지원이 화석연료에 비해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에 절대 100% 재생가능에너지 시대는 올 수 없다고 합니다.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그 2~3배를 투입해야 하는 비효율이 지속된다면 아마 그 말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계속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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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그래프는 현재 파시브하우스(Passivhaus; Passive House) 인증 심사 중인 판교의 한 주택을 대상으로 건축물에너지성능을 조정해서 간단하게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입니다. 실제는 연간 난방에너지요구량 13.3 kWh/(m²a)인 파시브하우스입니다. 여기에 단열, 열교, 창호, 차양, 문, 기밀, 환기, 난방·온수 설비 등을 달리한 두 가지 조건을 가정하여 에너지성능을 비교해보았습니다.1

    겨울철 실내 평균 기온 20℃ 등 실내 쾌적성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요구량 전체를 비교해보면(그림 1) 파시브하우스일 때에 비하여 최근 건축물 에너지절약설계기준을 따르면 2배가량, 현재 서울지역 아파트 표본 평균을 따르면 3배가량 에너지요구량이 많습니다. 이를 지붕과 벽에서 얻은 재생가능전기로 공급한다고 가정하는 재생가능1차에너지소요량(Primary Energy Renewable; PER)으로 환산해보면 서울 아파트 수준이 파시브하우스 대비 3.6배, 건축물 에너지절약설계기준이 2.1배 많습니다. 난방을 위한 재생가능1차에너지소요량만 비교를 해보면(그림 2) 서울 아파트 평균이 판교 파시브하우스 대비 9배, 에너지절약설계기준 경우는 4배 높았습니다. 단 한 사례를 놓고 거칠게 비교했기 때문에 정교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지만 흘리지 않는 기술 수준이 미약할수록 버리지 않아도 될 에너지를 마구 버리게 된다는 점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자 하는 노력 모두를 아울러 에너지효율 향상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중에서도 ‘파시브기술’로 묶어 부를 수 있는 일련의 기술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시브기술이란 용어는 제가 개념화하고 있는 말로서 아직 널리 알려진 말도 아니고, 이론적으로 탄탄하게 확립된 용어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를 목표로 가꾸고 있는 개념입니다. 굳이 없는 용어를 만들어서 개념화하려는 까닭은 여러 가지 에너지효율화 기술 중에서 이 일련의 기술이 줄일 수 있는 에너지소비량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파시브기술이 미약할 때 우리는 도심의 하늘을 덥히기 위해서 난방을 하고, 땅 밑의 하수관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온수를 만들게 됩니다. 흘려버리는 에너지가 실제 이용하는 에너지보다도 많다면 무엇보다 새는 구멍부터 막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기후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파시브기술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파시브기술의 개념

     

    에너지이용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파시브한 에너지이용방식이고, 또 하나는 액티브한 에너지이용방식입니다.2

     

    파시브한 에너지이용방식: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주어진 여건 안에서 물리적 환경을 조성하여 에너지 흐름을 조절하는 에너지이용방식

    액티브한 에너지이용방식: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주어진 여건 밖에서 별도의 에너지원을 동원하여 에너지 흐름을 창출하는 에너지이용방식

     

    역사 시대 전체를 놓고 볼 때 인류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액티브 에너지원은 많지 않았습니다. 바이오매스, 즉 나무가 주종이었고, 여기에 근육의 힘인 축력과 인력을 더한 정도가 이용할 수 있는 액티브 에너지원의 전부였을 겁니다. 액티브한 에너지이용방식은 인류 문명에서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화석연료라는 에너지밀도가 매우 높은 에너지원을 이용하는 액티브기술이 발전하면서 최근래의 문명은 액티브한 에너지이용방식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증기기관, 내연기관 등이 모두 고밀도에너지원 액티브기술입니다. 

     

    파시브기술은 뒤늦게야 발전하였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전통적인 파시브기술은 있었습니다만 매우 원시적이고 소박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옷을 입고, 움집을 짓고, 남향으로 집을 앉히는 것 등이 원시 파시브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파시브기술의 출발점은 진공보온병의 발명 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3 진공보온병은 1892년 스코틀랜드 과학자 제임스 듀어 경(Sir James Dewar)이 실험용도로 발명했다고 합니다. 이를 기려 듀어병(Dewar flask)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후 1904년 라인홀트 부르거(Reinhold Burger)와 알베르트 아쉔브레너(Albert Aschenbrenner)라는 두 명의 유리공이 음료를 보관하는 용도로 듀어병을 상업화하고 써모스(Thermos)라는 이름을 붙여 특허를 낸 것이 오늘날 흔히 보는 보온병의 시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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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공보온병은 이중벽으로 된 용기 내부를 진공에 가깝게 만들어서 전도와 대류로 인한 열손실을 줄이고, 용기의 안쪽 면을 반사율이 높은 재질로 덮어 복사 열손실도 줄이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열이 이동하는 세 가지 방식을 최대한 방해하는 구조적 환경을 만들어서 열손실이 천천히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파시브기술은 이 진공보온병의 원리를 건축물을 비롯한 여러 곳에 적용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건축물과 같이 사람이나 장비, 물질이 들어가는 어떤 껍데기(외피)를 사이에 두고 그 안팎의 에너지흐름 환경을 조성하여 효과적으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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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브기술의 종류

     

     

    파시브기술로 묶을 수 있는 기술들은 아래 <표 1>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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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 대다수가 파시브하우스를 이루는 핵심 기술들로서 건축물 안에서의 에너지소비량을 줄이는 데 크게 이바지합니다. 이때 다른 기술의 적용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이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있고, 다른 기술과 함께 종합적인 판단하에 쓰이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기술이 있습니다. 가령 열회수 기술이나 파시브한 에너지 획득·차단·저장 기술은 독립적으로 써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열 기술은 기밀 기술, 열교 차단 기술과 함께 잘 계획되어 쓰이지 않으면 문제를 낳게 됩니다. 기밀 기술은 강제 환기 설비 없이 적용하면 실이 큽니다. 열교 차단 기술은 고단열, 고기밀과 함께 이용할 때에 비로소 경제성이 생깁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파시브기술이 각각 건축물 에너지소비량을 줄이는 데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동시에 기술의 독립성과 연계성을 잘 따져서 써야 합니다. 모든 건물을 파시브기술의 총체인 파시브하우스로 새로 짓거나 고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비교적 저렴하고 독립적인 파시브기술부터 먼저 수용하는 것도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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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브기술의 특성
     
    파시브기술은 원하는 에너지흐름이 형성되도록 물리적 환경을 조성해놓고 그 과실을 따먹는 기술이기 때문에 대부분 한 번 만들어두면 특별히 손볼 일이 없는 기술입니다. 모터가 달린 열회수환기장치 이외에는 동력을 필요로 하는 기술도 별로 없고, 부실이 없는 한 대부분의 기술은 자재의 수명 따라 오래 유지됩니다. 어찌보면 게으름뱅이를 위한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현대적인 파시브기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기술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파시브기술이 적용되는 건축물의 외피는 상당한 기술 수준과 자재의 품질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영세한 여건에는 적용되기 어렵습니다. 처음 적용할 때 적지 않은 비용이 듭니다. 다만 유지비용은 현저하게 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파시브기술은 부익부빈익빈의 기술이 되기 십상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라와 계층은 큰 투자를 하여 현대적 파시브기술을 도입한 뒤 낮은 유지관리 비용과 높은 쾌적성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습니다. 반면 경제적 여유가 없는 나라와 계층은 투자 여력이 없어 파시브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에너지 안보가 흔들리면 부익부빈익빈이 파시브기술을 둘러싸고 드러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파시브기술은 전문가들이 깊게 연구하지 않으면 부자를 위한 값비싼 고급 기술로 천상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성의 있는 연구가 있다면 값비싼 건축외피 파시브기술에 대한 투자를 설비 규모의 경량화, 최적화로 상당히 상쇄해 중간층이 수용할 수 있는 비용 수준까지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공공의 투자와 원조가 있다면 저렴하게 유지되는 공동의 피난 시설이나 휴식 공간 등 공공 시설에 적용하여 더 많은 계층과 나라가 혜택을 보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비교적 저렴하고 독립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로부터 시작하여 하나 하나 파시브기술들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이 기술들에 대해 우리가 눈을 뜨는 만큼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이 조금 더 확보될 거라 기대합니다.
     
    주석
    1 첫 번째 조건은 최근 실측 연구(진혜선 외(2019). 계측 데이터를 활용한 아파트 표본 세대에서의 용도별 에너지사용량 원단위(2017-2018) 분석. 한국건축친환경설비학회논문집 13(4), pp. 211-222.)의 표본 평균에너지사용량에 가깝게 맞춘 결과이고, 두 번째 조건은 2018년 9월부터 시행 중인 국토교통부 고시 제2017-881호 <건축물의 에너지절약설계기준>에 따라 단열 및 창호 조건을 맞춘 결과입니다.
    2 우리말로 옮길 말이 마땅치 않아서 많은 사람이 영어 표현을 빌려 액티브(active): 패시브(passive)로 이야기합니다. 저는 파시브기술의 발전에 독일어권 사람들의 공헌이 지대하므로 굳이 외래어를 빌려 이야기할 바에는 독일어 표현을 쓰는 게 좋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익숙한 영어식 표현은 그대로 두고 핵심용어만 독일어 방식으로 하다보면 우습게도 액티브: 파시브가 되어 버려 자연스럽지 않기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도덕경>의 爲, 無爲 개념이 공학적인 차원의 active, passive 뜻을 잘 살려주는 것 같아 ‘무위(無爲)기술’, ‘유위(有爲)기술’이란 용어를 고민하고 있긴 합니다만 불필요한 인상이 덧붙을 수가 있어 아직은 공부를 더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3 Wikipedia. “Vacuum flask”. https://en.wikipedia.org/wiki/Vacuum_flask
     

    최우석 파시브기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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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 윤수진

    2019.10.28 10:21

    흥미롭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저의 집의 경우 조명, 조리기구, 냉방은 현재로도 충분히 절약하고 있고 또 그래서 사용량이 아주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정말 위의 그래프처럼 겨울철이 되면 온수와 난방부분은 패시브하우스가 아닌 일반아파트(중앙난방식)에 거주하면서 사용량을 줄이기가 쉽지 않네요. 적정온도를 유지하고 있는게 더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다라는 정보가 있어 언제 보일러를 끄고 켜야 할지 늘 고민이 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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