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기스칸에서 바이킹까지 - 정치지도자들은 기후변화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조회 수: 7425, 2014.03.27 02:48:13
  •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가르침은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되새겨볼만하다. 역사를 살펴보면 기후변화의 영향이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나라나 종족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친 기후변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의 극적인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오늘날의 기후변화 위기는 전례 없는 것으로서 그 범위와 결과는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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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Grist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 속에서 자연적인 기후변화를 버텨낸 사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500년 만의 혹독한 가뭄에 직면한 제리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마지막 명황제의 실수를 염두에 두어야 할까?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최악의 기후변화로부터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앙코르와트 신성도시의 마지막 황제인 쁘니에 얏(Ponhea Yat)으로부터 배워야할 점은 없는 것일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녹아내리고 있는 북극에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몽고 징기스칸의 성공담을 참고할 것인가? 아래에서는 최근 미국의 유명 웹진 그리스트(www.grist.org)에 실린 글을 참고해 기후변화가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친 궤적을 살펴보려 한다.



    1. 몽골제국의 징기스칸 – 기후 전사(climate war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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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ancois Philipp


    첫 번째 사례는 징기스칸이다. 그는 기후 덕분에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대표적인 ‘기후 전사(climate warrior)’로 분류된다. 징기스칸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해 거대한 몽골 제국을 건설했던 인물인데, 그것을 가능케 했던 특급 무기는 바로 기막히게 좋은 날씨였다.


    최근 미국 국립과학협회보(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실린 한 논문은 오늘날 몽골에 서식하는 나무의 나이테 자료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징기스칸이 제국을 건설했던 시기는 혹독한 추위가 특징인 초원 기후의 중앙아시아가 1,000여년에 걸쳐 가장 온화하고 습윤한 기후였다는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이와 같은 유리한 기후가 몽골이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형성하는데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13세기 초의 몽골의 유리한 기후는 목초 생산량과 말을 포함한 가축 수의 증가를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따뜻하고 비가 많은 날씨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나무들의 나이테는 21세기 초 중앙아시아를 괴롭혔던 가뭄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날씨는 몽골의 과거 1,00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지독한 것이었다. 인위적인 지구온난화는 기온 상승을 불러와 삶의 조건을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몽골의 기온은 향후 수십 년간 지구 평균보다 더 높게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한다면 수많은 가축이 죽고 대규모 이주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 정책 실패의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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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명나라는 3세기에 걸쳐 막강한 힘을 가진 왕조였다. 하지만 1630년경부터 기록적인 가뭄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과거 약 2,000년에 걸쳐 가장 약화된 몬순 탓이었다. 가뭄이 민중들의 소요를 촉발시켰음은 물론이다. 인류학자인 브라이언 패이건(Brain Fagan)은 「소빙하기: 기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했나(1300-1850)」에서 중국의 당시 상황을 동시대 유럽의 혼돈보다 더 무질서했던 시기로 묘사한다. 비옥했던 양자강 유역은 전염병과 홍수, 기근 등에 시달렸으며, 이처럼 취약한 현실은 정치적 혼란과 이민족의 침략을 초래했다.


    2011년 에모리(Emory) 대학 역사학자 토니오 안드래이드(Tonio Andrade)가 발간한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에 따르면, 17세기 중반의 중국은 1370년경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를 통틀어 가장 추운 날씨를 보였다. 게다가 날씨는 건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숭정제의 명나라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할만한 능력과 의지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환관의 발호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명나라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금단의 도시(Forbidden City, 지금의 자금성)에 은둔했던 숭정제는 지방에 주둔하던 군대를 자신의 거처인 베이징으로 빼냄으로서 스스로의 권한을 반란군에게 이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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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offrey Parker


    그러는 동안 역시 가뭄에 시달리고 있던 만주족은 중국 북부를 초토화시켰다. 재난이 누적되면서 매우 많은 지방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결국 숭정제는 베이징을 포기하고 남부의 수도 난징으로 천도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1644년 4월 25일 아침 숭정제는 자금성 뒤편 언덕에 올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3. 바이킹의 후예 리프 에릭슨(Lief Erikson) - 기후 적응의 실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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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even Pavlov


    「속도와 폭력성: 왜 과학자들은 기후변화의 변곡점(tipping point)를 두려워하는가」의 저자이자 저명한 환경저널리스트인 프레드 피어스(Fred Pearce)에 따르면, 10~11세기의 온화한 날씨는 바이킹들이 ‘붉은 에릭(Erik the Red)’의 영도 아래 그린란드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붉은 에릭의 아들 리프 에릭슨은 10세기 무렵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뉴펀들랜드 지역을 발견한 위대한 바이킹 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린란드에서 시작된 에릭슨의 위대한 모험은 추운 날씨 탓에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린란드 남부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400년간 번영을 누렸지만 15세기 중반 무렵 수확량이 감소하고 바다가 얼어붙으면서  유럽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됐다. 문제는 적응의 실패였다. 기후가 점차 추워지고 있었지만 그린란드 바이킹들은 북극곰이나 바다표범을 사냥하기보다는 따뜻한 날씨에 적합한 닭 사육과 곡식재배를 고수했다. 그 결과 과거 175센티미터에 달하던 평균키는 152센티미터 정도로 줄어들었다. 충분히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윈저(Windsor) 대학의 과학자 피터 세일(Peter Sale)은 그의 책 「우리의 죽어가는 지구(Our Dying Planet)」에서 고대 그린란드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한다. 중세 온난기(9세기~13세기)에는 포도와 목재 무역이 활발했던 그린란드는 그 다음 이어진 소빙하기(14~19세기)에는 쇠락을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바다는 얼어붙어 노르웨이와 그린란드 간의 무역은 중단되고 말았다. 소빙하기의 기온은 1℃가량 낮은 수준이었다. 1℃의 기온 차이가 그린란드 바이킹들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에릭슨 시절 나무와 풀로 뒤덮였던 ‘그린’란드는 결국 바이킹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저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자신의 책 ‘붕괴(Collapse)’에서 이렇게 묻는다. “왜 고대 그린란드 사람들은 소빙하기에 이누이트들처럼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가?” 이 질문은 사실 기후변화 위기에 직면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 “적응인가 죽음인가?”



    4. 앙코르와트의 마지막 왕 쁘니에 얏(Ponhea Yat) - 기반시설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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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lbera


    2010년 콜럼비아 대학 라몽-도헤르티 지구관측소(Lamont-Doherty Earth Observatory)는 나무 나이테 연구를 통해 앙코르와트 고대 도시에 기초해  600년간 지속된 크메르 문명의 붕괴 원인이 수십 년간 지속된 가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9~14세기 무렵 동남아시아까지 뻗어나갔던 왕국은 1431년 오늘날의 태국과의 긴 전쟁으로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크메르의 왕 쁘니에 얏은 지금의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을 건설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뭄은 왕국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과거 1,000년 동안 이 지역에서 가장 건조했던 해는 1403년이었다. 이 시기는 앙코르가 멸망하기 30년 전쯤이다. 당시 앙코르와트는 386 평방마일에 달하는 방대하고 복잡한 관개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반시설은 문명국의 필수 요소였다. 관개시스템은 다소 가문 시기에도 농업에 완충역할을 했다. 그러나 도시의 강점은 점차 약점으로 변해갔다.


    나선형 수로와 둑과 저수지가 만들어진 것은 12세기 말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복잡한 기반시설들은 변화하는 기후에 유연한 대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유지를 위해 많은 노동력과 비용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관개시스템은 오히려 취약해져 결국 몇 차례 반복된 가뭄과 홍수에 붕괴되고 말았다.


    기후변화와 침식은 크메르 왕국이 더 이상 외부의 적에 대항할 수 없을 만큼 힘을 약화시켰다. 뛰어난 관개시설과 같은 최선의 기후변화 적응 대책도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앙코르와트의 비극은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칠 기후의 힘에 대한 조용한 증언인지도 모른다(기후변화행동연구소 이승민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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